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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해석과 이해(구조와 에세이)/책 해석과 이해(경제,전략)

[7번의 대전환] '해롤드 제임스' - 1840년대 대기근부터 2020년 팬데믹까지 7대 경제 위기의 세계화

by 유미 와 비안 2025. 11. 7.

'해롤드 제임스(Harold James)'『7번의 대전환』(Seven Crashes)

프린스턴대 해롤드 제임스의 '7번의 대전환'에 대한 심층 분석 보고서. 1840년대 대기근부터 2020년 팬데믹까지 7대 경제 위기가 세계화를 어떻게 형성했는가, '좋은 위기'와 '나쁜 위기' 프레임워크에 대한 비판적 고찰, 그리고 미래 경제 전망을 제시합니다.

 

총평


해롤드 제임스의 『7번의 대전환』은 방대한 경제사를 '위기'라는 핵심 키워드와 '공급/수요 충격'이라는 명쾌한 분석 틀로 꿰뚫어 낸 지적 성취가 돋보이는 역작이다. 복잡다단한 역사적 사건들을 일관된 내러티브로 엮어내는 저자의 능력은 독자들에게 세계화의 동학을 이해하는 강력한 관점을 제공한다. 특히 각 시대의 위기가 당대의 지배적인 경제 사상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낳았는지를 추적하는 부분은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경제학, 역사, 사상사를 넘나드는 그의 해박한 지식은 이 책을 단순한 경제사 서술을 넘어선 깊이 있는 문명사적 통찰로 격상시킨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인 명쾌한 분석 틀은 동시에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다. '좋은 위기'와 '나쁜 위기'라는 이분법은 현실의 복잡성을 담아내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하며, 때로는 위기 속에서 고통받은 인간의 경험을 소외시키는 비정한 시각으로 흐를 위험을 내포한다. 또한 위기의 결과를 결정하는 데 있어 정치적 리더십, 사회적 합의, 이념적 선택과 같은 인간의 주체적인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경제적 충격의 유형에 따른 결정론적 서사로 귀결될 우려가 있다.

 

 

7번의 대전환 / 해롤드 제임스 - 공급 / 수요 충격

 

7번의 대전환』(Seven Crashes)

 

서론: 위기의 해부학—세계화의 청사진인가?


세계적인 경제사학자 해롤드 제임스(Harold James) 프린스턴대 교수의 최신작 『7번의 대전환』(Seven Crashes)은 지난 200년간의 세계 경제사를 관통하는 대담하고도 도발적인 명제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세계 경제 질서의 역사가 평온한 진화의 과정이 아니라, 기존의 구조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거대한 위기들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격동의 역사를 분석하기 위해 하나의 강력한 분석 틀을 제시하는데, 이는 위기를 '좋은 위기(Good Crisis)'와 '나쁜 위기(Bad Crisis)'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접근이다.


'좋은 위기'는 식량, 에너지, 핵심 부품 등의 공급 부족(Supply Shock)에서 촉발된다. 이러한 위기는 고통스럽지만, 결핍이라는 강력한 동기를 통해 사회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비효율을 제거하며, 더 넓은 세계와 연결되도록 강제한다. 즉, 공급 충격은 혁신을 낳고 결과적으로 세계화를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긍정적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나쁜 위기' 금융 공황이나 신용 붕괴와 같은 수요 부족(Demand Shock)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위기는 불확실성을 증폭시켜 경제 주체들이 소비와 투자를 줄이고 현금을 축장하게 만든다. 그 결과는 시장 위축, 보호무역주의 강화, 그리고 세계로부터의 고립이다. 수요 충격은 세상을 더 작고 덜 번영하게 만드는 파괴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위기 (Crisis) 시기 (Period) 유형 (Type) 핵심 원인 (Key Cause) 결과 및 세계화에 미친 영향 (Outcome & Impact on Globalization) 주요 사상가 (Key Thinkers)
대기근과 대반란 1840년대~1870년대 좋은 위기 (공급) 식량 부족, 감자 마름병 교통 혁명(철도, 증기선), 국제 무역 촉진, 1차 세계화 가속 칼 마르크스
크래시와 한계 혁명 1873년~1880년대 나쁜 위기 (수요) 금융 공황, 철도 거품 붕괴 장기 불황, 보호무역주의 대두, 경제 사상의 전환 제번스, 멩거, 발라스
대인플레이션 (1차) 1920년대~1930년대 나쁜 위기 (수요) 제1차 세계대전, 전쟁 배상금 초인플레이션, 경제적 민족주의 강화 칼 헬페리히
대공황 1929년~1939년 나쁜 위기 (수요) 주식시장 붕괴, 신용 축소 세계화의 일시 중지, 정부 개입주의 부상 케인스, 슘페터
대인플레이션 (2차) 1970년대 좋은 위기 (공급) 오일 쇼크, 브레튼우즈 붕괴 에너지 효율 혁신, 신흥국 부상,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촉진 밀턴 프리드먼
대침체 2008년 나쁜 위기 (수요)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 과잉 금융 규제 강화, 신흥국 둔화, 경제적 민족주의 재부상 벤 버냉키
대봉쇄 2020년~2022년 좋은 위기 (공급) 팬데믹, 공급망 붕괴 디지털 전환 가속, 백신 민족주의, 공급망 재편 논의 -

 

 

제1부: 7번의 대전환을 통과하는 서사적 여정


서문. 물가는 어떻게 세계화의 형태를 결정짓는가


해롤드 제임스는 역사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력을 '가격'이라는 신호 체계에서 찾는다. 서문에서 그는 세계화가 단일한 현상이 아니라 수요와 공급의 역학 관계에 따라 그 형태와 속도, 방향을 달리하며 진화해 온 과정임을 역설한다. 가격은 자원의 희소성을 알리는 가장 강력한 지표이며, 경제 위기는 바로 이 가격 신호 체계에 가해지는 거대한 충격(shock)이다. 저자는 이 충격을 공급 측면과 수요 측면으로 나누어 분석함으로써, 각각의 위기가 어떻게 세계 경제의 구조를 재편하고 세계화의 물결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 책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들을 나열하는 연대기가 아니라, 가격과 충격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계화의 내적 논리를 해부하는 지적 탐험의 서막을 연다.


제1장. 1840~1870년대: 대기근과 대반란, 식량위기에서 시작된 금융위기


제임스의 첫 번째 대전환 이야기는 '굶주린 40년대(Hungry Forties)'로 알려진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시작된다. 이 시기의 위기는 인류가 가장 원초적으로 직면하는 공급 충격, 즉 식량 부족에서 비롯되었다. 

1845년 유럽을 덮친 감자 역병균(Phytophthora infestans)은 아일랜드 인구의 3분의 1이 주식으로 의존하던 감자 농사를 초토화시켰다. 이로 인해 약 100만 명이 아사하고 100만 명 이상이 고향을 등지는 아일랜드 대기근이 발생했으며, 유럽 대륙 전역에서도 밀과 호밀 흉작이 겹치며 극심한 식량난이 이어졌다.


이 극심한 식량 위기는 단순한 인도주의적 재앙에 그치지 않았다. 식량 가격이 폭등하자 가계의 가처분 소득은 식료품 구매에 모두 소진되었고, 공산품에 대한 수요는 급감했다. 이는 제조업의 침체로 이어졌고, 기업의 도산과 금융기관의 부실을 야기하며 식량 위기는 곧 금융 위기로 전이되었다. "경제적 비참함과 그에 대한 공포"는 유럽 대륙을 휩쓴 1848년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굶주린 민중의 분노는 낡은 정치 체제를 뒤흔드는 거대한 에너지로 폭발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이 파괴의 과정 속에서 '좋은 위기'의 역설적인 창조력을 발견한다. 대기근은 식량과 사람을 대규모로, 그리고 신속하게 이동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를 던졌다. 이 절박함이 바로 증기기관을 활용한 교통망, 즉 철도와 증기선에 대한 폭발적인 투자와 기술 혁신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속도와 규모로 물자와 사람이 대륙과 대양을 넘나들게 되면서, 고립되었던 지역 시장들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 시장으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운송 비용의 극적인 하락은 국제 무역을 촉진했고, 이는 제1차 세계화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핵심 동력이었다.


이 시대의 지적 거인은 단연 칼 마르크스(Karl Marx)였다. 제임스는 마르크스를 단순한 혁명 선동가가 아니라, 이 새로운 위기 주도형 글로벌 자본주의의 본질을 가장 날카롭게 꿰뚫어 본 분석가로 조명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 축적 과정에 내재된 모순, 즉 생산력은 발전하지만 노동자의 구매력은 정체되어 결국 과잉생산 공황을 피할 수 없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자본가들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노동자(가변자본)를 기계(불변자본)로 대체하면서 총자본 대비 이윤의 비율(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내재적 한계이자 주기적 위기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1840년대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마르크스의 통찰이 탄생한 시대적 배경이었다.


제2장. 1873~1880년대: 크래시와 한계 혁명, 금융 혼란의 시기


1840년대의 위기가 물리적 결핍에서 시작된 공급 충격이었다면, 1873년의 위기는 인간의 탐욕과 공포가 빚어낸 수요 충격의 전형이었다. 이 위기는 1873년 5월 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심장부인 비엔나 증권거래소의 붕괴로 시작되었다. 통제 불능의 투기 열풍이 꺼지면서 시작된 '검은 금요일'의 패닉은 순식간에 유럽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이 불길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했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정부의 보조금과 투기 자본에 힘입어 광적인 철도 건설 붐에 휩싸여 있었다. 이 거품의 중심에는 당대 최고의 투자은행이었던 제이 쿡 앤 컴퍼니(Jay Cooke & Company)가 있었다. 그러나 철도 투자가 수익을 내지 못하고 과잉 상태에 이르자, 1873년 9월 제이 쿡은 파산을 선언했다. 거대 은행의 붕괴는 금융 시스템 전체에 대한 신뢰의 붕괴, 즉 전형적인 수요 충격을 유발했다. 신용 시장은 얼어붙었고, 은행 파산이 연쇄적으로 이어졌으며, 뉴욕 증권거래소는 역사상 처음으로 열흘간 문을 닫았다.


이 위기의 결과는 '나쁜 위기'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873년 공황은 18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는 장기 불황(Long Depression)의 서막을 열었다. 각국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 장벽을 높이는 보호무역주의로 회귀했고, 자유로운 자본과 상품의 이동을 특징으로 하던 제1차 세계화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이 지적 공백 속에서 경제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했으니, 바로 한계혁명(Marginal Revolution)이다. 영국의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William Stanley Jevons), 오스트리아의 칼 멩거(Carl Menger), 스위스의 레옹 발라스(Léon Walras)는 거의 동시대에 독립적으로 고전학파의 노동가치론을 폐기하는 혁명적 사상을 제시했다. 그들은 상품의 가치가 그것을 생산하는 데 투입된 노동 시간(공급 측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그 상품의 마지막 한 단위를 소비함으로써 얻는 주관적 만족감, 즉 한계효용(marginal utility)(수요 측면)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등장은 경제 분석의 초점을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객관적 비용에서 주관적 가치로, 총량에서 한계량으로 이동시킨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으며, 현대 미시경제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제3장. 1920~1930년대: 제1차 세계대전과 대인플레이션, 경제사 최악의 위기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에게 전례 없는 파괴를 안겼을 뿐만 아니라, 전후 경제 질서를 뿌리부터 뒤흔든 거대한 충격이었다. 이 시기의 위기는 전쟁 비용 조달과 패전국에 대한 가혹한 배상금 요구가 촉발한 극단적인 수요 충격, 즉 화폐 가치에 대한 신뢰의 완전한 붕괴에서 비롯되었다.
전쟁 당사국들은 막대한 전비를 감당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는 대신 막대한 빚을 내고 화폐를 발행하는 손쉬운 길을 택했다. 특히 독일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패전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이라 계산했다. 그러나 독일이 패망하자 상황은 역전되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전쟁 배상금을 부과했다. 독일 경제의 지불 능력을 완전히 무시한 이 징벌적 조치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재앙으로 몰아넣었다.


배상금 지불을 위해, 그리고 1923년 프랑스와 벨기에가 배상금 불이행을 빌미로 독일의 공업 심장부인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지불하기 위해, 바이마르 정부는 윤전기를 돌려 돈을 찍어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 결과는 역사상 최악의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이었다. 1923년 11월, 1달러의 가치는 4조 2천억 마르크와 맞먹었다. 돈은 말 그대로 휴지 조각이 되었고, 사람들은 빵 한 덩이를 사기 위해 손수레에 돈을 싣고 다녀야 했다.


이러한 화폐 시스템의 붕괴는 '나쁜 위기'의 파괴적 결과를 여실히 보여준다. 초인플레이션은 저축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중산층의 부를 완전히 증발시켰고, 사회적 신뢰와 공동체 의식을 파괴했다. 경제적 혼란과 절망은 극단주의 정치 세력이 성장하는 토양이 되었고, 이는 결국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즘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이 위기는 세계화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각국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제적 민족주의와 자급자족(autarky) 경제 체제를 강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독일 재무장관이었던 칼 헬페리히(Karl Helfferich)와 같은 인물들은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려는 노력 대신, 이를 통해 국가 부채를 실질적으로 탕감하고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위험한 도박을 벌이며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제4장. 1929~1939년: 대공황, 세계화의 종말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월스트리트 주식시장 붕괴는 인류 역사상 가장 깊고 길었던 경제 위기, 즉 대공황(Great Depression)의 신호탄이었다.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간 궁극의 수요 충격이었다.


대공황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부상하며 '광란의 20년대'라 불리는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과도한 신용 팽창, 주식 시장의 투기 거품, 그리고 부의 극심한 불평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농업 부문은 만성적인 과잉생산과 가격 하락으로 신음했고, 유럽 경제는 전쟁의 상처와 배상금 문제로 여전히 불안정했다. 여기에 각국이 경쟁적으로 관세를 인상하는 보호무역주의(대표적으로 미국의 스무트-홀리 관세법)가 가세하면서 세계 무역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주가 폭락은 이 모든 취약성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기폭제였다. 자산 가치가 증발하자 소비와 투자는 급감했고, 은행들은 연쇄적으로 파산하며 통화 공급량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그 결과는 제임스가 '세계화의 일시 중지'라고 부른 참혹한 상황이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세계 무역량은 60% 이상 감소했고, 각국은 자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환율을 경쟁적으로 평가절하하고 수입을 통제하는 블록 경제를 형성했다. 자본과 상품,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을 특징으로 하던 세계화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 '나쁜 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명의 실업자를 낳았고,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전체주의의 부상을 초래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이 거대한 위기 앞에서 두 명의 위대한 경제 사상가가 등장했다. 영국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시장이 스스로 균형을 회복할 것이라는 고전학파 경제학의 '보이지 않는 손'을 비판했다. 그는 대공황의 본질이 총수요의 부족에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공공사업과 같은 적극적인 재정 지출을 통해 유효수요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전후 '수정자본주의' 시대의 막을 열었다.


반면,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는 다른 진단을 내놓았다. 그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동력이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의 과정에 있다고 보았다. 불황은 낡고 비효율적인 기술과 기업을 시장에서 퇴출시키고(파괴), 기업가들의 혁신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내는(창조) 고통스럽지만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슘페터에게 대공황은 자본주의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역동적인 과정의 일부였다.


제5장. 1970년대: 대인플레이션, 풍요와 과잉이 불러온 위기


1970년대의 위기는 제임스의 분석 틀에서 다시 한번 등장하는 '좋은 위기', 즉 공급 충격의 사례다. 전후 30년간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두 개의 기둥이 동시에 무너지면서 위기는 시작되었다. 첫 번째는 1971년 8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달러의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면서 브레튼우즈 체제가 사실상 붕괴한 사건이다. 이는 전후 세계 통화 질서를 지탱하던 고정환율제의 앵커를 제거한 통화 공급 충격이었다.
두 번째이자 더 극적인 충격은 1973년 10월에 터졌다.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한 서방 국가들에 대항하여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가 석유 금수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이로 인해 국제 유가는 불과 몇 달 만에 4배나 폭등했다. 산업 시대의 혈액과도 같은 석유 공급에 가해진 이 충격은 세계 경제 전체를 마비시켰다.


이 두 공급 충격의 결합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경제 현상, 즉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을 낳았다. 경기는 침체하여 실업률이 치솟는 동시에 물가는 급등하는, 기존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필립스 곡선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는 이 위기 역시 '좋은 위기'의 속성을 지녔다고 분석한다. 석유 파동은 에너지 낭비가 만연했던 서구 산업 사회에 값비싼 교훈을 주었다. 에너지 가격 급등은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기술 혁신과 대체 에너지 개발에 대한 막대한 투자를 촉발했다. 또한, 유가 상승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산유국들의 '오일 달러'는 국제 금융 시장으로 유입되어 새로운 형태의 금융 세계화를 추동하는 자금이 되었다. 이 위기는 결과적으로 낡은 산업 구조를 재편하고,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높이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이 시대의 지적 헤게모니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설명하는 데 실패한 케인스주의자들에게서 시카고학파의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에게로 넘어갔다.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하며, 정부의 재량적 경기 부양책 대신 중앙은행이 통화 공급량을 준칙에 따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사상은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혁명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제6장. 2008년: 대침체, 지나친 세계화가 초래한 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이자, 제임스의 분류에 따르면 또 다른 거대한 수요 충격이었다. 이 위기는 물리적인 재화의 부족이 아니라, 복잡하게 파생된 금융 상품에 대한 신뢰와 수요가 하루아침에 증발하면서 발생했다.
위기의 씨앗은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 붕괴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주도한 초저금리 정책에서 잉태되었다. 저금리 환경은 전 세계적으로 '수익률 찾기(search for yield)' 현상을 낳았고, 막대한 유동성은 미국의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신용도가 낮은 차입자들에게 주택 자금을 빌려주는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월스트리트의 금융공학은 이 위험한 대출들을 증권화(securitization)라는 마법을 통해 주택저당증권(MBS), 부채담보부증권(CDO) 등 고수익 상품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상품들은 신용평가사들의 높은 등급을 등에 업고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팔려나갔다. 그러나 2006년부터 미국 주택 가격이 하락세로 돌아서자, 서브프라임 대출은 걷잡을 수 없는 부실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결정타는 2008년 9월 15일,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의 파산이었다. 이는 금융 시스템의 심장부에서 신뢰라는 혈액이 완전히 멎어버리는 사건이었다. 전 세계 은행들은 서로를 믿지 못해 돈을 빌려주지 않았고, 신용 시장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 신용 경색이라는 극심한 수요 충격은 실물 경제로 급속히 전이되어 '대침체(Great Recession)'를 야기했다.


'나쁜 위기'를 막기 위해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대공황의 교훈을 따라 전례 없는 규모의 구제금융과 정책 공조에 나섰다. 특히 당시 연준 의장이었던 벤 버냉키(Ben Bernanke)는 대공황 연구의 대가답게, 제로금리 정책과 더불어 중앙은행이 장기 국채나 MBS를 대규모로 매입하여 시장에 유동성을 직접 공급하는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QE)라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단행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대공황과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할 수 있었지만, 위기는 세계화의 흐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위기 이후 강화된 금융 규제, 늘어난 국가 부채, 그리고 위기의 진원지였던 서구식 금융 세계화에 대한 반감은 이후 보호무역주의와 경제적 민족주의가 다시 고개를 드는 배경이 되었다.


제7장. 2020~2022년: 대봉쇄, 세계화가 남긴 과제


해롤드 제임스가 분석하는 마지막 대전환은 우리 모두가 경험한 코로나19 팬데믹이다. 이 위기는 1840년대 대기근 이후 가장 순수한 형태의 공급 충격으로 시작되었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각국 정부의 봉쇄 조치, 즉 '대봉쇄(The Great Lockdown)'는 공장의 가동을 멈추고 국경을 폐쇄함으로써 전 세계의 생산 활동과 물류 네트워크를 물리적으로 단절시켰다. 마스크와 인공호흡기 같은 의료용품에서부터 반도체, 목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공급망 붕괴가 일어났다.


제임스의 틀에 따르면 이 공급 충격은 '좋은 위기'의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 팬데믹은 비대면 경제로의 전환을 극적으로 가속화했다. 재택근무, 온라인 교육, 전자상거래 등 디지털 기술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mRNA 백신과 같은 혁신적인 기술 개발을 촉진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양면적이다. 위기는 세계화의 어두운 측면도 동시에 드러냈다. 팬데믹 초기 각국은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며 마스크 수출을 금지했고, 백신 개발 이후에는 선진국들이 백신을 독점하는 '백신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또한,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이 드러나자, 효율성만을 추구하던 '적시생산(Just-in-Time)' 시스템에 대한 반성이 일었고, 자국 내 생산(on-shoring)이나 동맹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friend-shoring)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한편, 위기 극복을 위해 각국 정부가 쏟아부은 막대한 재정 부양책은 공급망 병목 현상과 맞물려 수요를 과도하게 자극했고, 이는 팬데믹 이후의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제임스는 대봉쇄라는 위기가 세계화에 미칠 장기적 영향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본다. 이 위기는 디지털 기술을 통해 더 깊고 새로운 차원의 연결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국가 간 불신과 분열을 심화시켜 세계화를 후퇴시키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인류는 지금 그 갈림길에 서 있으며, 이 위기가 '좋은 위기'가 될지 '나쁜 위기'가 될지는 앞으로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유보적인 결론을 내린다.

 

 

(용어)


• 금본위제 (Gold Standard): 한 나라의 화폐 가치를 특정한 무게의 금에 고정시키고, 그에 상응하는 금의 보유량에 따라 화폐를 발행하는 통화 제도. 화폐 가치의 안정성을 보장하지만, 경제 상황에 따른 신축적인 통화 공급을 어렵게 만든다.
• 브레튼우즈 체제 (Bretton Woods System):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4년, 미국 브레튼우즈에서 연합국 대표들이 모여 수립한 국제 통화 체제. 미국 달러화를 금에 고정시키고($35 = 1온스$), 다른 국가들의 통화는 달러에 고정하는 '금-달러 본위제'를 근간으로 했다. 1971년 미국의 금태환 정지 선언으로 붕괴되었다.
• 스태그플레이션 (Stagflation): 경기 침체를 의미하는 스태그네이션(stagnation)과 물가 상승을 의미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 경제 활동이 위축되어 실업률은 높은데도 불구하고 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이례적인 현상을 말한다.
• 서브프라임 모기지 (Subprime Mortgage): 신용등급이 낮은(prime 등급 이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일반적으로 금리가 높고 채무 불이행 위험이 크다.
• 양적완화 (Quantitative Easing - QE): 중앙은행이 기준금리가 제로에 가까워 더 이상 금리 인하를 통한 경기 부양이 어려울 때, 국채나 주택저당증권(MBS) 등 장기 자산을 대규모로 매입하여 시장에 직접 유동성을 공급하는 비전통적 통화정책.
• 창조적 파괴 (Creative Destruction):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제시한 개념. 기술 혁신과 기업가의 도전이 낡은 기술, 제품, 기업을 시장에서 퇴출시키고(파괴), 그 자리에 새로운 산업과 시장을 만들어내는(창조) 역동적인 과정. 자본주의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보았다.
• 한계혁명 (Marginal Revolution): 1870년대 제번스, 멩거, 발라스 등에 의해 일어난 경제학의 패러다임 전환. 상품의 가치가 노동 투입량 등 객관적 비용이 아니라, 소비자가 느끼는 주관적인 '한계효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을 정립하여 현대 미시경제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7번의 대전환』(Seven Crashes) 구조적 해석


학문별 구조적 해석: 경제학과 심리학의 만남


해롤드 제임스의 분석은 거시경제적 충격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의 서사 이면에는 인간의 심리가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숨어있다. 특히 1873년, 1929년, 2008년의 금융위기, 즉 '나쁜 위기'들은 단순한 경제 변수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 심리의 드라마다. 이 위기들은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에서 시작하여 '공포(panic)'로 끝나는 동일한 심리적 패턴을 반복한다.


철도, 라디오, 인터넷, 서브프라임 모기지 등 새로운 기술이나 금융 혁신이 등장할 때, 초기 성공 사례는 대중에게 '이번에는 다르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이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을 강화시켜, 긍정적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위험 신호는 무시하게 만든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돈을 버는 것을 보며 뒤처질 수 없다는 불안감(FOMO, Fear Of Missing Out)은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를 유발하며 투기적 거품에 너도나도 뛰어들게 한다. 이 과정에서 대중은 합리적 분석보다 집단의 감정에 휩쓸리는 무리 행동(herd behavior)을 보인다.


그러나 거품이 한계에 도달하고 작은 균열(trigger)이 발생하면, 심리는 순식간에 정반대로 뒤집힌다. 자산 가격 하락은 이익을 얻는 기쁨보다 손실을 피하려는 고통을 훨씬 크게 느끼는 손실 회피(loss aversion) 성향을 자극한다. 한 명의 매도는 다른 사람의 공포를 유발하고, 이는 걷잡을 수 없는 투매(fire sale)로 이어진다. 신뢰가 무너진 시장에서 불확실성은 극대화되고, 경제 주체들은 모든 투자를 멈추고 안전자산(현금)으로 도피한다. 이것이 바로 제임스가 말하는 '수요 충격'의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결국 제임스의 '나쁜 위기'는 경제 시스템에 내재된 취약성이 인간의 근원적인 탐욕과 공포라는 심리적 증폭기를 통해 폭발하는 과정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이는 위기가 단순한 외생적 충격이 아니라, 시장이라는 시스템과 인간 심리가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내생적 현상임을 시사한다

 

7번의 대전환』(Seven Crashes)거미인간(호모 넥서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인류의 힘은 허구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거대한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세계화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촘촘한 정보 네트워크이며, 경제 위기는 이 네트워크의 특정 지점에서 발생하는 정보의 왜곡, 단절, 혹은 과부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각 위기의 전파 속도와 양상은 당대의 정보 네트워크 기술 수준에 의해 결정되었다. 1873년 공황은 갓 부설된 대서양 횡단 해저 전신 케이블을 통해 전파되었다. 정보는 이전보다 빨라졌지만 여전히 제한적이었고, 위기는 몇 달에 걸쳐 점진적으로 확산되었다. 1929년 대공황은 라디오와 전화의 시대였다. 주가 폭락 소식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국적으로 실시간 전파되며 대중의 공포를 동기화했고, 은행 예금을 인출하라는 소문은 전화선을 타고 퍼져나가 '뱅크런'을 가속화했다.
2008년 금융위기는 최초의 인터넷 시대 위기였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소식은 블룸버그 단말기와 인터넷 뉴스 사이트를 통해 몇 분 만에 전 세계 금융기관으로 퍼져나갔다. 알고리즘으로 연결된 글로벌 은행 간 대출 시장은 거의 즉각적으로 마비되었다. 이는 정보 네트워크의 효율성이 시스템의 취약성을 얼마나 증폭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마지막으로 2020년 팬데믹은 소셜 미디어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시대의 위기였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중 보건 정보와 치명적인 가짜뉴스가 동일한 네트워크를 통해 빛의 속도로 퍼져나갔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방역 수칙은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된 새로운 사회적 규범이었으며, 이는 물리적 세계의 연결을 끊는 동시에 디지털 세계의 연결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역설을 낳았다.


결론적으로, 제임스가 분석한 7번의 위기는 단순한 경제 현상이 아니라, 인류가 구축한 정보 네트워크가 진화하며 겪는 성장통이자 시스템 실패의 기록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네트워크는 더욱 촘촘하고 빨라졌지만, 그만큼 더 빠르고 파괴적인 위기에 노출되는 '연결의 역설'을 보여준다

 

 

7번의 대전환』(Seven Crashes) 비평


해롤드 제임스의 '좋은 위기'와 '나쁜 위기'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워크는 200년간의 복잡한 경제사를 명쾌하게 정리하는 분석적 우아함을 지녔지만, 동시에 몇 가지 근본적인 비판에 직면한다. 그의 분석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었으며, 규범적으로 문제가 있고, 위기를 결정하는 정치적·이념적 요소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첫째, '좋은 위기'라는 명명의 윤리적 문제다. 1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아일랜드 대기근을 장기적으로 철도 건설과 세계화를 촉진했다는 이유로 '좋은 위기'로 분류하는 것은, 추상적인 경제 발전을 위해 구체적인 인간의 고통을 도구화하는 위험한 시각일 수 있다. 이는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개념이 지닌 냉혹함을 연상시킨다. 파괴의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관점을 배제한 채, 창조의 결과만을 긍정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편향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위기의 '좋음'과 '나쁨'은 누가, 어떤 관점에서 평가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개념이어야 한다.


둘째, 위기의 원인을 공급과 수요로 명확히 구분하는 것의 한계다현실의 위기는 공급과 수요 요인이 복잡하게 얽힌 피드백 루프의 결과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저자가 대표적인 공급 충격으로 꼽은 1970년대 오일 쇼크는, 그 배경에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재정 지출과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라는 수요 측면의 불안정성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2020년 팬데믹이라는 공급 충격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재정·통화 부양책이라는 수요 정책과 결합하여 전개되었다. 위기를 단일 원인(공급 혹은 수요)의 충격으로 환원하는 것은 현실의 복잡성을 과도하게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셋째, 위기의 결과를 결정하는 제도적, 이념적 요인을 과소평가한다. 제임스의 프레임워크는 위기의 유형(공급/수요)이 그 결과를 기계적으로 결정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위기에 대한 대응과 그 장기적 결과는 당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과 권력 구조, 그리고 제도의 설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가 『세계화와 그 불만』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듯이, 1990년대 동아시아와 러시아에서 발생한 경제 위기의 파괴적인 결과는 초기 충격 자체보다 IMF와 같은 국제기구가 강요한 '워싱턴 컨센서스' 기반의 긴축 정책과 성급한 시장 개방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위기의 향방이 객관적인 경제 법칙이 아니라, 이념과 권력의 상호작용 속에서 결정되는 정치경제학적 과정임을 보여준다. 제임스의 분석은 이러한 중요한 차원을 충분히 조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함께 읽어야 할 책


. 조지프 스티글리츠, 『세계화와 그 불만』 : 전 세계은행 부총재였던 저자가 IMF,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이 신자유주의 이념에 입각하여 개발도상국에 획일적인 정책을 강요함으로써 어떻게 위기를 악화시켰는지를 내부자의 시선으로 고발한다. 제임스의 구조적 분석에 정치·이념적 비판을 더해줄 필독서다.

. 찰스 킨들버거, 로버트 알리버,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금융위기의 역사를 다룬 불멸의 고전. 투기적 광기에서 시작해 공황으로 끝나는 금융위기의 반복적인 패턴을 심리학적, 역사적 통찰로 분석한다. 제임스가 '나쁜 위기'로 분류한 수요 충격의 미시적, 심리적 메커니즘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 라구람 라잔, 『폴트라인』: 전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저자는 2008년 금융위기의 근본 원인이 금융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심화되는 '소득 불평등'이라는 사회 구조적 단층선(fault line)에 있다고 주장한다. 위기의 원인을 더 깊은 사회 구조에서 찾는 시각을 제공한다.

. 마크 레빈슨, 『세계화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 : 이 책은 '컨테이너'라는 기술 혁신이 어떻게 전후 세계화 시대를 열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추적한다. 공급망과 기술 혁신이 세계화를 추동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제임스의 '좋은 위기' 논의에 풍부한 사례를 더해준다.

. 유발 노아 하라리, 『넥서스』 : 이 보고서에서 위기 분석의 틀로 활용된 '호모 넥서스' 개념의 원전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정보 네트워크가 인류의 역사와 권력 구조를 어떻게 형성해왔는지에 대한 하라리의 통찰은 경제 위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하게 해준다.

. 오건영, 『위기의 역사: 한국의 외환위기부터 글로벌 금융위기, 인플레이션의 부활까지 현대 경제 위기의 핵심 쟁점들을 한국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명쾌하게 설명한다. 제임스의 거시적 역사 서술을 보완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위기 해설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