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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해석과 이해(구조와 에세이)/책 해석과 이해(철학,사상)

[여성을 억압하는 세계] '마사 누스바움' : 인간 존엄성에 관한 보편적 정의

by 유미 와 비안 2025. 10. 28.

세계적 석학 '마사 누스바움'의 『 여성을 억압하는 세계

21세기 페미니즘과 정치철학의 지형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이 책의 가장 큰 공헌은 전 세계 여성들이 겪는 억압의 문제를 단지 특정 문화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닌,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보편적 정의의 문제로 성공적으로 격상시켰다는 점에 있다.

 

총평 


누스바움은 GDP와 같은 차갑고 추상적인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 삶의 다층적이고 질적인 가치를 '잠재역량'이라는 정교한 철학적 언어로 섬세하게 복원해냈다. 특히 '적응적 선호'라는 개념을 통해, 구조적 억압이 어떻게 인간의 내면 깊숙이 침투하여 욕망마저 길들이고 스스로를 억압의 공범으로 만드는지를 폭로한 부분은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인도의 가난한 여성들의 생생한 목소리에서 출발하여 보편적 정의의 원칙을 구축하고, 다시 그 원칙을 통해 현실의 불의한 법과 제도를 비판하는 지적 여정을 통해 철학이 어떻게 현실의 고통에 응답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탁월한 모범을 제시한다.


물론, '보편주의'를 향한 그녀의 용감한 시도는 '문화 제국주의'라는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으며, 그녀의 이론이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의 틀 안에서 작동함으로써 자본주의와 같은 거대한 구조적 문제에 대한 비판이 부족하다는 한계 또한 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한 사회의 발전을 무엇으로 평가해야 하는가? 국가는 시민에게 최소한 무엇을 보장해야 하는가? 인간다운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여성을 억압하는 세계』는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가능하다'고 힘주어 답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성별, 인종, 계급, 국적을 넘어 '모든 인간의 존엄한 삶을 위한 실질적 기회를 보장하는 것'에 있다고 선언한다. 

 

여성을 억압하는 세계 / 마사 누스바움 - 존엄성에 관한 보편적 정의

 

여성을 억압하는 세계

 

페미니즘과 국제 개발 - 새로운 질문의 시작


세계적인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저서 『여성을 억압하는 세계』는 국제 개발 담론의 심장부에 페미니즘적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이 책은 국가의 발전 수준을 측정하는 전통적인 지표, 즉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나 사회 전체의 효용 총합을 기준으로 삼는 공리주의적 접근법이 어떻게 여성의 삶의 질을 은폐하고 왜곡하는지를 날카롭게 고발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러한 거시적 지표들은 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극심한 불평등을 가릴 뿐만 아니라, 오랜 억압에 길들여져 자신의 열악한 처지에 만족하게 된 여성들의 왜곡된 선호(adaptive preferences)를 정당화하는 심각한 맹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누스바움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과 함께 발전시킨 '잠재역량 접근법(The Capabilities Approach)'을 제시한다. 이 접근법은 "각각의 사람은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는 단순히 개인이 얼마나 많은 자원(소득, 재산)을 소유했는지가 아니라, 그 자원을 활용하여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영위할 실질적인 기회, 즉 '잠재역량'을 가졌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물론 잠재역량 접근법의 두 창시자인 센과 누스바움 사이에는 미묘한 관점의 차이가 존재한다. 센은 어떤 잠재역량이 중요한지에 대한 목록을 특정하지 않고, 각 사회의 민주적 토론과 공적 합의에 맡기는 절차적 접근을 선호한다. 반면 누스바움은 인간 존엄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국가가 최소한으로 보장해야 할 '10가지 핵심 잠재역량'의 구체적인 목록을 제시하며, 보다 규범적이고 철학적인 입장을 취한다.
누스바움은 이러한 철학적 논의가 추상에 머무르지 않도록, 개발도상국인 인도의 가난한 여성 바산티(Vasanti)와 자얌마(Jayamma)의 구체적인 삶의 서사로 독자를 이끈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여성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바산티, 벽돌 공장에서 남성보다 더 힘든 일을 하고도 적은 임금을 받는 것에 항의할 생각조차 못 했던 자얌마의 이야기는 '적응적 선호'의 비극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들의 목소리는 왜 개인의 주관적 만족도가 아닌, 인간다운 삶을 위한 보편적 기준이 필요한지를 역설하는 이 책의 가장 강력한 윤리적 근거가 된다.

 

 

1장: 보편 가치 옹호


이 장에서 누스바움은 "보편적 가치는 특정 문화(서구)의 가치를 다른 문화에 강요하는 문화 제국주의"라는 문화 상대주의자들의 강력한 비판에 정면으로 맞서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다. 그녀는 세 가지 핵심 논증을 통해 문화 상대주의의 허점을 파고든다.


1. '문화'로부터의 논증 비판: "여성 억압은 그들의 전통 문화이므로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누스바움은 '문화'가 결코 균일하거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어떤 문화 속에도 항상 억압에 저항하고 변화를 갈망하는 비판적인 목소리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외부자가 여성 억압을 '그들의 문화'라고 섣불리 존중하는 것은, 오히려 그 문화 내부의 소수자와 저항자들의 목소리를 짓밟고 현상 유지를 돕는 행위가 될 수 있다.


2. '다양성'으로부터의 논증 비판: "문화적 다양성은 그 자체로 좋은 가치"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누스바움은 회의적이다. 노예제, 여성 할례, 명예 살인과 같은 악습 또한 인류 역사의 '다양성'의 일부였다. 중요한 것은 다양성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다양성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지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다.


3. '개입주의/온정주의'로부터의 논증 비판: 보편적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서구의 가치를 강요하는 온정주의(paternalism)라는 비판에 대해, 누스바움은 오히려 억압받는 이들의 왜곡된 선호를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을 영원히 무력한 상태에 머물게 하는 진정한 온정주의라고 반박한다. 진정한 존중은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즉 '실천이성'과 같은 핵심 잠재역량을 길러주는 것이다.


이러한 반론을 바탕으로, 누스바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엄한 삶을 위해 최소한으로 보장받아야 할 10가지 핵심 인간 역량(Central Human Capabilities) 목록을 제시한다. 이는 모든 정부가 자국민을 위해 헌법적 원리로 보장해야 할 최소한의 기준이다.


①. 생명(Life): 비정상적으로 일찍 죽지 않고 정상적인 수명을 누릴 수 있는 역량.
②. 신체 건강(Bodily Health): 좋은 건강을 유지하고, 충분한 영양과 주거를 보장받을 역량.
③. 신체 보전(Bodily Integrity): 폭력(성폭력, 가정폭력 등)으로부터 안전하고, 자유롭게 이동하며, 성적 만족과 출산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역량.
④. 감각, 상상, 사고(Senses, Imagination, and Thought): 교육을 통해 상상하고 생각하고 추론하는 능력을 기르고, 표현의 자유를 누릴 역량.
⑤. 감정(Emotions): 타인과 애착 관계를 형성하고, 사랑하고 슬퍼하며, 분노와 감사를 느낄 수 있는 역량. 두려움과 불안에 의해 감정 발달이 저해되지 않을 역량.
⑥. 실천이성(Practical Reason): 좋은 삶에 대한 자신만의 구상을 형성하고, 삶의 계획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역량. 양심의 자유를 포함한다.
⑦. 관계(Affiliation):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해 살아가고, 다양한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하며, 타인의 입장을 상상할 수 있는 역량. 또한, 타인과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 존중받으며 차별받지 않을 역량.
⑧. 다른 종(Other Species): 동물, 식물, 자연과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역량.
⑨. 놀이(Play): 웃고, 놀고,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역량.
⑩. 환경에 대한 통제(Control Over One's Environment): 정치적 참여를 통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역량(정치적 통제), 그리고 재산을 소유하고 타인과 동등한 기반에서 일할 권리를 가질 역량(물질적 통제).


여기서 누스바움은 잠재역량 접근법의 가장 중요한 개념적 구분인 '기능발휘(Functionings)'와 '역량(Capabilities)'의 차이를 강조한다. '기능발휘' 개인이 실제로 성취한 상태나 활동(예: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한 상태)을 의미하는 반면, '역량'그것을 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예: 굶주리지 않을 기회)를 의미한다. 누스바움은 국가의 목표가 시민들에게 특정 기능발휘를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좋은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역량'의 문턱을 보장하는 데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개인의 자유와 다원주의를 존중하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국가는 모든 시민이 굶주리지 않을 '역량'을 제공해야 하지만, 종교적 신념에 따라 자발적으로 단식하는 개인의 선택(영양 섭취라는 기능발휘를 하지 않을 자유)은 존중해야 한다.


2장: 적응적 선호와 여성의 선택지


잠재역량 접근법이 왜 전통적인 경제학의 복지주의(welfarism)나 공리주의보다 우월한지를 '적응적 선호(Adaptive reference)'라는 개념을 통해 심층적으로 논증한다.


'적응적 선호'란 이솝 우화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처럼, 개인이 가질 수 없거나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애초에 원하지 않았다고 스스로의 욕망과 선호를 왜곡시키는 심리 기제를 말한다. 누스바움은 이러한 현상이 체계적인 억압과 불평등에 노출된 여성들에게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선택의 여지가 극도로 제한된 환경 속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거나 현재 상태에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


이러한 적응적 선호의 존재는 개인의 '선호 만족'이나 '주관적 행복도'를 사회 발전의 척도로 삼는 복지주의와 공리주의의 근본적인 한계를 폭로한다. 만약 정책의 목표가 사람들의 현재 선호를 만족시키는 것이라면, 억압에 적응해버린 여성들의 왜곡된 선호를 그대로 인정하고 현재의 불평등한 상태를 유지하는 정책이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받을 기회도, 일할 권리도 박탈당한 채 "여자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여성의 '선호'를 만족시켜주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인가? 누스바움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녀는 다시 인도의 두 여성, 바산티와 자얌마의 사례로 돌아간다. 바산티가 남편의 폭력을 여성의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것, 자얌마가 부당한 임금 차별에 대해 분노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진정한 자아에서 비롯된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지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환경에 대한 고통스러운 적응이자 생존 반응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그들의 현재 만족도를 기준으로 정책을 세우는 것은 부당하며, 오히려 그들이 더 나은 삶을 상상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기회, 즉 '잠재역량'을 제공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다.


결국 '적응적 선호'는 단순히 개인의 심리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정치적 억압'의 결과물이자 명백한 증거이다. 그렇기에 그 해결책 또한 개인의 마음을 바꾸는 심리 상담이 아니라, 여성들에게 교육, 건강, 정치 참여 등 실질적인 선택지를 제공하는 정치적·사회적 개입이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윤리학 서적을 넘어, 사회 정의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는 정치철학 서적으로서의 면모를 명확히 드러낸다.


3장: 종교의 역할


이 장은 자유주의 사회가 직면하는 가장 어려운 딜레마 중 하나인 '종교의 자유'와 '성평등'의 충돌 문제를 다룬다. 자유주의 국가는 헌법의 핵심 원리로서 개인의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수많은 종교적 전통과 관습이 여성의 평등권을 심각하게 침해해왔을 때, 국가는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며 그 정당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누스바움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핵심 원칙을 제시한다.
1. 설득력 있는 국가 이익(Compelling State Interest): 국가는 원칙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야 하지만, '설득력 있는 국가 이익'이 위협받을 때는 종교적 실천에 개입할 수 있다. 누스바움은 앞서 제시한 '10가지 핵심 잠재역량의 보장'이야말로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즉, 어떤 종교적 관습이 여성의 생명, 신체 보전, 교육받을 권리 등 핵심 잠재역량을 침해한다면, 국가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개입할 정당성을 갖는다.


2. 국교 수립 금지와 평등 보호: 국가는 특정 종교를 억압하거나 선호해서는 안 되며(국교 수립 금지 원칙),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시민이 헌법 앞에서 동등한 권리와 보호를 받도록 보장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을 바탕으로 누스바움은 인도의 '개인법(Personal Laws)'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인도는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각 종교 공동체별로 결혼, 이혼, 상속 등에 관한 각기 다른 법률을 적용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소수 종교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한다는 긍정적인 명분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종교의 이름 아래 여성을 차별하는 불평등한 구조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용인하는 결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이슬람 개인법(샤리아법)에 따라 무슬림 여성들은 이혼 후 남편으로부터 부양비를 받는 데 있어 힌두 여성보다 훨씬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개인이 어떤 종교적 배경을 가졌느냐에 따라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권이 다르게 적용되는 심각한 모순을 야기한다.


누스바움은 종교를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종교 또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사회 제도 중 하나이며, 다른 모든 제도와 마찬가지로 '핵심 잠재역량'이라는 보편적 정의의 기준에 의해 평가받아야 한다. 이는 종교 자체를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방식으로 작동할 때, 국가가 '모든 시민의 평등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개입할 수 있는 철학적·법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중요한 시도이다.


4장: 사랑, 돌봄, 그리고 존엄성


마지막 장에서 누스바움은 페미니즘 이론의 가장 핵심적인 전장인 '가족' 문제로 논의를 확장한다. 그녀는 가족을 사랑과 애정이 넘치는 비정치적인 '사적 영역'으로만 간주하고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자유주의의 관념에 근본적으로 도전한다. 누스바움에게 가족은 낭만적인 공간 이전에, 역사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구성된 '정치적' 공간이며, 현실에서 여성에 대한 불평등과 폭력이 가장 빈번하고 은밀하게 발생하는 장소다.


이러한 맥락에서 누스바움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정치철학자로 꼽히는 존 롤스(John Rawls)의 딜레마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누스바움은 롤스의 『정의론』이 제시한 '공정으로서의 정의'갖는 위대한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이론이 '가족' 내부에서 발생하는 정의의 문제를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롤스는 가족을 미래의 정의로운 시민을 길러내는 중요한 사회 기관으로 인식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제시한 '정의의 원칙'(평등한 자유의 원칙, 차등의 원칙)이 가족 내부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것에는 주저하는 모순을 보였다. 이는 공적 영역(정치, 시장)과 사적 영역(가족)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자유주의의 전통적인 이분법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가정 내에서 발생하는 여성의 무급 돌봄 노동, 자원 분배의 불평등, 가정 폭력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이 '정의'의 영역 바깥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누스바움은 특히 여성이 역사적으로 전담해 온 가사 및 돌봄 노동이 '사랑'이나 '모성애'와 같은 자연적 본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여성에게 강요된 '독보적인 인공물(a unique artifact)'임을 역설한다. 이 막대한 양의 무급 노동은 여성의 다른 잠재역량들, 즉 교육받을 기회, 정치에 참여할 기회, 심지어 놀이를 즐길 기회까지 체계적으로 박탈하는 불의의 핵심 원인이다.


이 장에서 누스바움은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페미니즘의 유명한 구호를 철학적으로 정교하게 논증한다잠재역량 접근법은 가족이라는 가장 내밀한 공간까지 정의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 접근법은 가족 구성원 '각자'를 개별적인 존엄성을 지닌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선언하며, '가족 전체의 화목'이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가족은 더 이상 정의의 원칙이 멈추는 곳이 아니라, 정의가 시작되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장소인 것이다.

 

 

 

(용어 해설)


• 잠재역량 접근법 (Capabilities Approach): 한 사회의 발전 수준이나 개인의 삶의 질을 소득이나 자산(GDP 등)이 아닌, 각 개인이 '무엇을 하거나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자유(잠재역량)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이론.
• 기능발휘 (Functionings): 개인이 실제로 행하거나 이룬 상태. (예: 건강한 상태, 교육받은 상태)
• 잠재역량 (Capabilities): 다양한 기능발휘들 중에서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들의 집합.
• 적응적 선호 (Adaptive Preferences): 억압적이거나 선택지가 극히 제한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구를 포기하거나 현재의 열악한 상태에 만족하도록 선호 자체를 바꾸는 현상.
• 공리주의 (Utilitarianism): 사회 전체의 행복(효용)의 총합을 극대화하는 것을 도덕적 목표로 삼는 이론. 누스바움은 이것이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적응적 선호를 간과한다고 비판한다.
• 문화 상대주의 (Cultural Relativism): 어떤 행위나 신념의 옳고 그름은 각 사회의 문화적 기준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된다는 입장. 보편적인 도덕 기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 정치적 자유주의 (Political Liberalism): 존 롤스가 후기에 제시한 이론으로, 다양한 가치관(종교, 철학 등)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기본 구조는 특정 가치관이 아닌 모든 합리적인 시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정치적' 원칙에 기반해야 한다는 주장.

 

여성을 억압하는 세계』구조적 해석


철학적/정치학적 해석


• 아리스토텔레스적 기반의 현대적 재해석: 누스바움 이론의 근간에는 "인간의 좋은 삶(good life)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근본적인 질문이 자리 잡고 있다. 그녀가 제시한 '기능발휘(functioning)' 개념은 인간 고유의 기능이 탁월하게 발휘되는 상태를 의미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개념과 깊이 연결된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자유 시민 남성에게만 해당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엘리트주의적, 남성중심적 한계를 넘어, 모든 인간은 인종, 성별, 계급, 국적과 상관없이 보편적 존엄성을 지닌다는 현대적 가치를 결합한다. 이를 통해 고전 철학의 통찰을 현대 사회의 평등주의적 요구에 맞게 재창조해낸다.


• 자유주의 전통의 비판적 계승과 확장: 누스바움은 존 로크, 존 스튜어트 밀, 그리고 존 롤스로 이어지는 자유주의(liberalism) 정치철학의 전통 안에 확고히 서 있다. 그녀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자유주의의 핵심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하지만 그녀는 전통적 자유주의가 주로 '형식적' 권리에만 머물렀다고 비판하며, 그 권리가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는 '실질적' 기회, 즉 '잠재역량'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존 롤스와 같은 위대한 자유주의 사상가조차 간과했던 가족 내부의 정의 문제, 장애인의 권리, 국경 너머의 세계시민적 정의, 동물의 권리 문제 등을 잠재역량의 틀로 끌어들임으로써, 자유주의 이론의 외연을 21세기의 복잡한 문제들을 다룰 수 있도록 혁신적으로 확장한다.


심리학적 해석


• '적응적 선호'의 심리 기제 분석: 누스바움의 핵심 개념인 '적응적 선호'는 사회심리학의 여러 이론들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이는 개인이 자신의 신념과 현실 사이의 불일치로 인한 불편함을 줄이려는 '인지 부조화 감소(cognitive dissonance reduction)' 이론, 통제 불가능한 부정적 상황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때 무기력감을 학습하게 되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이론, 그리고 한번 형성된 경로를 벗어나기 어려운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 이론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억압적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인지할 때, 개인은 자신의 욕망이나 신념을 현실에 맞춰 변경함으로써 심리적 안정감을 찾으려 한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생존을 위한 적응 기제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주체성을 상실하고 억압을 내면화하게 만드는 파괴적인 족쇄가 된다.


• '감정'과 '실천이성'의 복권: 누스바움이 10가지 핵심 역량 목록에 '감정(Emotions)'과 '실천이성(Practical Reason)'을 나란히 포함시킨 것은 매우 중요한 심리학적 함의를 갖는다. 이는 인간을 단순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만 보는 좁은 관점에서 벗어나, 사랑, 슬픔, 분노와 같은 다양한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목표를 스스로 성찰하고 계획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 존엄성의 핵심적인 요소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특히 '감정'을 핵심 역량으로 인정한 것은, 감정이 이성적 판단을 방해하는 열등한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 판단과 인간다운 삶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현대 뇌과학 및 심리학의 흐름과도 궤를 같이한다. 이는 감성 지능(EQ)의 중요성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성을 억압하는 세계거미인간(호모 넥서스)


• 선형적 발전관(GDP)에서 비선형적 가치망(잠재역량)으로의 전환: '호모 넥서스' 이론은 인류 문명이 원인과 결과, 계획과 실행이라는 '선형적 사고'에서 벗어나, 복잡한 상호연결성과 관계망을 이해하는 '비선형적 사고'로 전환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의 잠재역량 접근법이러한 전환을 정치철학의 영역에서 완벽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녀는 국가의 발전을 '경제 성장률'이라는 단일하고 선형적인 척도로 측정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대신, 생명, 건강, 감정, 관계 등 서로 대체되거나 하나의 단위로 환원될 수 없는 10가지의 다원적 가치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영향을 미치는지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그물망(web)' 또는 '네트워크' 형태의 평가 모델을 제시한다. 이는 '판단'이 아닌 '감지'를, '객체(GDP 수치)'가 아닌 '연결(역량들 간의 관계)'을 중시하는 호모 넥서스의 사고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 관계 중심적 인간관과 사회 설계: 호모 넥서스는 고립된 개별 객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자아를 구성하고 세계를 이해한다. 누스바움의 이론 역시 '각 개인을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칸트적 원칙을 계승하면서도, '관계(Affiliation)'를 인간의 핵심 역량으로 포함시킨다. 이는 인간이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고,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며,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다운 삶의 필수 조건임을 의미한다. 또한 그녀의 분석은 가족, 종교, 국가와 같은 공동체가 개인의 역량 발현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을 결코 고립된 원자가 아닌 복잡한 관계망 속의 존재로 파악한다. 누스바움의 페미니즘은 바로 이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불균형과 불평등에 주목하는 철학이며, 이는 호모 넥서스의 '관계 중심 사고'와 깊은 사상적 친연성을 가진다.

 

 

여성을 억압하는 세계』비평


1. 문화 제국주의(Cultural Imperialism)라는 비판
• 핵심 논거: 누스바움이 제시한 10가지 핵심 역량 목록이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가치관에 기반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그녀의 철학적 뿌리인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의 사상 자체가 특정 문화의 산물이며, 이를 '보편적' 인간의 본질로 규정하고 모든 사회에 동일한 잣대로 적용하려는 시도는 새로운 형태의 지적 식민주의 또는 문화 제국주의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개인의 실천이성'이나 '환경에 대한 통제'와 같은 역량은 공동체의 조화나 전통적 가치를 더 중시하는 문화권에서는 낯설거나 부차적인 가치로 여겨질 수 있다.
• 근거: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과 같은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누스바움과 같은 서구 페미니스트들이 제3세계 여성들을 '도움이 필요한 수동적 피해자'로 대상화하고, 그들 문화 내부의 고유한 저항 방식이나 다양한 가치 체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보편적인 목록을 제시하는 행위 자체가 다양한 지역적 맥락과 여성들의 주체성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2. 목록의 정당성 문제 (The Problem of Justifying the List)
• 핵심 논거: "왜 하필 '이' 10가지 역량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목록이 어떻게 철학적으로 객관적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다. 누스바움은 이 목록이 다양한 문화권의 신화, 종교, 철학을 교차 검토하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광범위한 직관적 합의(롤스의 '중첩적 합의' 개념을 차용)를 통해 도출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비판자들은 그 과정이 여전히 누스바움이라는 한 철학자의 엘리트주의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고 본다.
• 근거: 아마티아 센이 구체적인 역량 목록 만들기를 주저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은 어떤 역량이 중요한지에 대한 목록은 외부의 철학자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각 사회 구성원들의 민주적인 토론과 공적 숙의 과정을 통해 그 사회의 맥락에 맞게 결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누스바움의 목록은 이러한 민주적 절차를 생략하고 '본질주의(essentialism)', 즉 '인간다운 삶'에 대한 하나의 고정된 정의를 내림으로써, 다양한 삶의 방식을 포용하지 못하고 특정 가치를 강요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3. 자유주의의 한계 및 자본주의 비판의 부재
• 핵심 논거: 누스바움의 접근법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의 틀 안에 머물러 있으며, 이로 인해 여성 억압을 야기하는 더 깊은 구조적 문제를 간과한다는 비판이다.
• 근거:
o 개인주의적 한계: 잠재역량이 궁극적으로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설정됨으로써, 인간의 근본적인 상호의존성이나 돌봄 관계의 중요성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 돌봄 윤리(Ethics of Care) 페미니스트들은 인간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만 상정하는 자유주의적 인간관 자체를 비판하며, 누스바움의 이론 역시 이러한 한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o 자본주의 문제 간과: 마르크스주의 및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누스바움의 이론이 여성 억압의 근본 원인 중 하나인 자본주의적 착취 구조나 계급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녀의 해결책은 주로 국가의 헌법적, 법적 개입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글로벌 자본주의가 제3세계 여성의 노동을 어떻게 착취하고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심화시키는지에 대한 분석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함께 읽어야 할 책


정의론 /존 롤스/ 이학사 2003 /누스바움이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자유주의 정의론의 원전. 특히 '가족'과 '사적 영역'에 대한 롤스의 관점을 이해하는 것은 누스바움의 4장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자유로서의 발전/ 아마티아 센 /갈라파고스 /2013 /잠재역량 접근법의 또 다른 창시자인 센의 독자적인 관점을 이해하고, 누스바움과의 철학적 차이(목록화 문제 등)를 비교하기 위한 필독서.

정의의 아이디어/ 아마티아 센 /지식의날개 /2019/ 롤스의 이상적 정의론을 비판하며 현실의 부정의를 줄여나가는 '비교 사법'을 제시한다. 누스바움의 보편 목록화에 대한 센의 입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로즈마리 퍼트넘 통/ 학이시습/ 2019 /누스바움이 속한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특징과 한계를 급진주의, 마르크스주의, 포스트식민주의 등 다른 페미니즘 조류와 비교하며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역량의 창조/ 마사 누스바움/ 돌베개 /2015 /본서의 후속작 격으로, 잠재역량 접근법을 더욱 체계적으로 다듬고 다양한 학문적 비판에 답변하며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준다.

정치적 감정 /마사 누스바움/ 책세상/ 2023 /본서에서 제시된 '감정' 역량을 심화 탐구한 저작. 정의로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공적 감정(연민, 사랑 등)을 어떻게 함양할 수 있는지 논하며 그녀의 사상적 확장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