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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해석과 이해(구조와 에세이)/책 해석과 이해(경제,전략)

[역량의 창조] '마사 누스바움' - 구조적 해석과 비평

by 유미 와 비안 2025. 10. 25.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의 창조』구조적 해석과 비평

 

총평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의 창조』는 사회 정의와 인간 발전에 대한 담론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이 책의 가장 큰 공헌은 발전 논의의 중심을 차가운 경제 지표에서 살아 숨 쉬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존엄성으로 되돌려 놓았다는 데 있다. "한 국가가 얼마나 부유한가?"라는 질문을 "그곳의 시민들이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함으로써, 누스바움은 우리에게 발전과 정의를 사유하는 새로운 언어와 도덕적 나침반을 제공했다.


10대 핵심 역량 목록은 그 자체로 완벽한 해답이라기보다는, 인간 존엄성의 핵심을 둘러싼 전 지구적 대화를 촉발하는 강력한 출발점이다. 공리주의와 자원주의 등 기존 이론들의 한계를 명확히 하고, 아리스토텔레스적 인간 번영의 이상을 현대 정치적 자유주의의 틀 안에서 성공적으로 재구성한 그녀의 지적 성취는 탁월하다.
물론, 보편적 목록이 지닌 가부장주의의 위험, 아마티아 센과의 철학적 긴장, 그리고 글로벌 시대의 복잡한 현실 속에서의 이행 문제 등 이 책이 남긴 과제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철학적 논쟁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마저도 역량 접근법이 제기한 질문들이 얼마나 중요하고 생산적인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결론적으로, 『역량의 창조』는 단순히 하나의 이론을 소개하는 책을 넘어, 우리 각자에게 자신의 삶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성찰하게 만드는 강력한 도덕적 초대장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고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보장해야 하는가? 

 

역량의 창조 / 마사 누스바움 - 구조적 해석과 비평

 

 

역량의 창조  구조적 해석


정치철학적 해석: 결과 지향적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누스바움의 이론은 존 롤스의 전통을 잇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한 형태로 분류될 수 있다그러나 롤스가 '공정한 절차'를 통해 합의된 원칙을 강조하는 절차주의적 측면이 강하다면, 누스바움은 '인간다운 삶'이라는 실질적인 '결과'에 더 큰 무게를 둔다는 점에서 '결과 지향적 자유주의'로 볼 수 있다. 롤스의 정의론이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좋은 삶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기본재'라는 수단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 누스바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수단을 통해 달성되어야 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의 실질적인 내용, 즉 10대 핵심 역량이라는 목적 자체를 정의의 핵심으로 삼는다.


이는 자유지상주의가 주장하는 '소극적 자유'(간섭으로부터의 자유)나, 복지국가 모델이 추구하는 '자원 분배'를 넘어, 개인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실현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유' 또는 '실질적 자유'를 국가의 핵심 의무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국가가 단순히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소극적인 역할을 넘어, 모든 시민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실질적 기회를 창출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책무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철학적 전환을 의미한다.


윤리학적 해석: 현대적으로 재구성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누스바움 이론의 윤리학적 토대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학, 특히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즉 '인간의 번영' 또는 '좋은 삶'이라는 개념에 깊이 맞닿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학의 근본 질문은 "인간으로서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였으며, 그 답은 인간 고유의 기능, 즉 이성을 잘 발휘하며 덕 있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누스바움의 10대 핵심 역량은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질문에 대한 현대적이고 정치적인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인간이 번영하는 삶, 즉 '진정으로 인간다운 기능(truly human functioning)'을 발휘하며 사는 삶에 필수적인 조건들을 목록화한다. '실천이성'이나 '감각, 상상, 사유'와 같은 역량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이성적 기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관계'나 '감정'과 같은 역량은 인간이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는 그의 통찰을 반영한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나의 이상적인 '좋은 삶'의 모델을 제시했다면, 누스바움은 정치적 자유주의의 원칙에 따라 가치의 다원성을 존중한다. 그녀가 제시하는 것은 강제적인 '기능(functioning)'의 목록이 아니라, 각자가 선택할 수 있는 '역량(capability)'의 목록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좋은 삶' 개념을 현대 다원주의 사회의 맥락에 맞게 재구성하여, 보편적인 인간 존엄성의 기반을 제공하면서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최대한 보장하려는 시도이다.


심리학적 해석: 번영을 위한 사회적 조건


누스바움의 역량 목록은 단순히 철학적 사변의 산물이 아니라, 현대 심리학, 특히 자기결정성 이론(Self-etermination Theory, SDT)과 긍정 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의 경험적 연구 결과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이는 그녀의 규범적 주장에 대한 강력한 경험적 지지 근거를 제공한다.
자기결정성 이론은 인간이 심리적으로 건강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율성(Autonomy), 유능성(Competence), 관계성(Relatedness)이라는 세 가지 보편적인 심리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의 10대 핵심 역량은 바로 이 세 가지 심리적 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 사회-정치적 조건을 제공하는 틀로 해석될 수 있다.


• 자율성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는 누스바움의 '실천이성'(자신의 삶을 계획할 능력)과 '환경에 대한 통제'(정치적, 물질적 선택권) 역량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 유능성은 자신의 환경과 효과적으로 상호작용하고 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는 '신체 건강', '감각, 상상, 사유'(교육을 통한 능력 함양), '놀이' 등 다양한 역량을 통해 뒷받침된다.
• 관계성은 타인과 따뜻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는 '감정'(애착 형성 능력)과 '관계'(사회적 상호작용과 존중) 역량의 핵심 내용이다.


이처럼 역량 접근법은 인간의 심리적 번영(flourishing)에 필요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환경을 설계하기 위한 청사진을 제공한다. 긍정 심리학이 개인 수준에서 행복과 강점을 연구한다면, 누스바움의 이론은 사회 전체 수준에서 모든 구성원의 심리적 번영을 지원하는 정의로운 구조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정치적 긍정 심리학'의 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역량의 창조 거미인간(Homo Nexus)


시너지: '전환 요인'과 '관계'에 대한 통찰


'거미인간'의 비선형적 사고는 누스바움 이론의 가장 혁신적인 부분과 깊은 공명점을 가진다. 누스바움이 기존 경제학의 선형적 모델(자원 → 결과)을 비판하며 제시한 '전환 요인' 개념은 본질적으로 '거미인간'적 통찰이다. 전환 요인은 개인의 능력, 사회적 규범, 정치적 환경, 가족 구조 등 수많은 요소들이 복잡한 '그물망'처럼 상호작용하여 한 개인의 실질적 기회를 결정한다고 본다. 이는 단순한 원인-결과 관계를 넘어, 예측 불가능하고 맥락 의존적인 비선형적 시스템으로서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거미인간'의 관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누스바움이 '관계(Affiliation)'와 '감정(Emotions)'을 핵심 역량 목록에 포함시킨 것은인간의 삶이 고립된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관계의 망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거미인간'의 핵심 전제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녀는 타인과 공감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하며, 존엄성을 인정받는 것이 인간다운 삶의 필수 조건임을 역설함으로써, 차가운 합리성만을 강조해 온 기존 자유주의 이론의 한계를 넘어선다. 이는 '객체에서 연결로'의 전환을 추구하는 '거미인간'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다.


긴장: 개인주의적 틀과 '의미의 그물'


그러나 '거미인간'의 관점은 누스바움 이론의 근본적인 한계 또한 날카롭게 드러낸다. 누스바움의 이론은 그 모든 섬세함에도 불구하고,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핵심 전제인 '개인'을 여전히 도덕적 분석의 최종 단위로 상정한다. 역량은 궁극적으로 '개인'에게 귀속되는 권리이자 자격(entitlement)으로 정의된다. 정의로운 사회란 개별 '노드(node)'들에게 10가지 필수품을 보장해주는 사회이다.
반면, '거미인간'의 관점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면, 도덕적 분석의 출발점은 개인이 아니라 '관계의 그물망'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관계(Affiliation)'는 개인이 소유하는 열 가지 역량 중 하나가 아니라, 다른 모든 역량이 피어날 수 있는 토대이자 전제 조건이다. 즉, 번영하는 개인은 건강한 관계망의 '결과'이지, 그 '출발점'이 아니다.
따라서 '거미인간'적 정의론은 "개인에게 무엇을 보장할 것인가?"를 묻기보다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신뢰가 두터우며 유연한 '의미의 그물(web of meaning)'을 직조할 수 있는가?"를 물을 것이다정의의 과제는 개인에게 역량 목록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질, 사회적 신뢰, 공동체 구조의 회복탄력성을 강화하는 것이 된다. 이 지점에서 누스바움의 이론은 '거미인간'이 보기에, 비선형적 현실을 진단했지만 그 해결책은 여전히 선형적이고 범주적인 '목록'의 형태로 제시하는, 과도기적 형태의 이론으로 비칠 수 있다. '거미인간'은 목록을 보장받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그물을 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역량의 창조』 비평과 반론


⑴ 가부장주의의 그림자와 목록의 문제


누스바움은 자신의 목록이 '중첩적 합의'를 통해 정당화되며, '두껍고 모호하게' 제시되어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보편적인 핵심 역량 목록을 철학자가 규정하고 국가가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일종의 온정주의적 가부장주의(paternalism)로 흐를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과연 누가, 어떤 권위로 모든 인류에게 적용될 '좋은 삶'의 핵심 요소를 규정할 수 있는가?.
또한 '문턱 수준'을 설정하는 문제도 간단치 않다. 예를 들어 '신체 건강' 역량의 최소 문턱은 어디까지인가?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예방적 건강 관리까지 포함하는가? 이 기준을 정하는 과정에서 특정 문화나 사회의 가치관이 다른 사회에 강요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누스바움은 민주적 토론을 통해 결정될 문제라고 답하지만, 이는 결국 그녀의 목록이 가진 규범적 힘을 약화시키고, 그녀가 비판했던 센의 불확정적인 접근법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⑵ 누스바움 대 아마르티아 센: 두 가지 역량 접근법


역량 접근법 내부의 가장 중요한 논쟁은 누스바움과 아마티아 센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는 '확정성'과 '민주성' 사이의 근본적인 긴장을 드러낸다.
• 누스바움의 접근법 (확정성 우선): 그녀는 사회 정의의 구체적인 목표를 제공하기 위해 명확하고 실질적인 10대 핵심 역량 목록을 제시한다. 이는 헌법의 기본권 조항처럼, 정부의 의무를 명확히 하고 정책 입안자들에게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는 철학자가 대중의 숙의 과정을 건너뛰고 정의의 내용을 미리 규정한다는 점에서 비민주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 센의 접근법 (민주성 우선): 센은 보편적인 역량 목록을 만드는 것에 의도적으로 반대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목록의 '내용'이 아니라, 각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적 이성(public reason)'과 민주적 토론을 통해 자신들에게 중요한 역량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이다. 이는 민주적 절차와 개인의 행위주체성(agency)을 최대한 존중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는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해 정책적으로 모호하며, 다수의 횡포나 억압적인 전통에 의해 소수자의 핵심 역량이 무시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


결국 이 둘의 차이는 "정의의 내용을 미리 확정하여 개인을 보호할 것인가, 아니면 정의의 내용을 민주적 과정에 맡겨 시민의 자율성을 존중할 것인가?"라는 정치철학의 오랜 딜레마를 반영한다.


⑶ 실천과 이행의 난제


누스바움의 이론은 역량 보장의 주된 책무를 개별 국가에 부여한다. 그러나 현대 세계는 그녀의 이론이 상정하는 이상적인 '질서정연한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내전으로 기능이 마비된 실패 국가, 자국민의 역량을 체계적으로 억압하는 독재 국가, 그리고 국경을 초월하는 거대 자본의 힘 앞에서 개별 국가의 역할은 점점 더 제한되고 있다.
기후 변화, 팬데믹, 글로벌 금융 위기와 같은 초국가적 문제들은 개별 국가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또한, 다국적 기업의 노동 착취나 환경 파괴 문제는 역량 침해의 책임 주체를 특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누스바움은 국제기구와 글로벌 시민사회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주권 국가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서 어떻게 실질적인 구속력을 가진 이행 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이론의 숭고한 목표와 그것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 사이의 거대한 간극은 역량 접근법이 마주한 가장 큰 실천적 과제로 남아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자유로서의 발전 / 아마티아 센 / 이종인 갈라파고스 2013 - 역량 접근법의 공동 창시자인 센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 저작. 누스바움의 목록 기반 접근법과 센의 자유 및 민주적 과정 중심 접근법의 미묘하고도 중요한 차이를 비교할 수 있다. 

정의론 / 존 롤스/ 황경식 이학사 2003  - 누스바움의 이론이 끊임없이 대화하고 비판하는 20세기 정의론의 가장 중요한 저작. '원초적 입장', '기본재', '중첩적 합의' 등 롤스의 핵심 개념을 이해해야 누스바움 논증의 깊이를 파악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 김명철 와이즈베리 2014  -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 칸트 등 누스바움이 비판하는 주요 정의론들을 대중적으로 쉽게 해설하여, 역량 접근법이 등장한 철학적 지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 이한 / 미지북스 / 2012 -  샌델의 공동체주의적 정의론을 비판하는 국내 저서. 샌델과 마찬가지로 '좋은 삶'에 대한 특정 관념을 공적 영역으로 가져오려는 누스바움의 시도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 비판의 논리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