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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해석과 이해(구조와 에세이)/책 해석과 이해(경제,전략)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센딜 멀레이너선' & '엘다 샤퍼'의 결핍의 덫, 그리고 희망의 설계

by 유미 와 비안 2025. 10. 29.

센딜 멀레이너선 & 엘다 샤퍼의 『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왜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하고, 바쁜 사람은 항상 시간에 쫓길까? 하버드와 프린스턴 석학들이 밝혀낸 '결핍'의 심리학. 이 책은 결핍이 우리의 인지 능력과 의사결정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붕괴시키는지, 그리고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설계의 지혜를 제시한다. 행동경제학의 새로운 고전, 『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를 파헤친다.

 

 

총평: 우리 모두는 결핍의 죄수가 될 수 있다


『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는 단순한 경제학이나 심리학 서적을 넘어,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민을 담은 우리 시대의 필독서다. 이 책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가난한 사람들은 왜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가?'라는 오만한 질문을 '가난이 어떻게 우리를 어리석게 만드는가?'라는 겸손하고 과학적인 질문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결핍이 우리의 뇌에 가하는 보이지 않는 '세금'을 명확히 보여줌으로써, 비합리적 행동의 책임을 개인의 성품이 아닌 환경의 압력으로 전환시킨다.


'터널링'과 '대역폭'이라는 두 가지 강력한 개념을 통해, 우리는 왜 마감에 쫓길 때 실수를 연발하는지, 왜 다이어트 중에 폭식을 하게 되는지, 그리고 왜 가난이 대물림되는 경향이 있는지에 대한 통일된 설명의 틀을 얻게 된다. 이는 우리 자신과 타인의 이해할 수 없던 행동을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는 '공감의 다리'를 놓아준다.
물론, 빈곤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더 깊은 천착이 아쉽다는 비판도 가능하지만, 이 책은 그 구조가 개인의 마음에 어떻게 작용하여 악순환의 톱니바퀴를 돌리는지를 그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결국 이 책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 모두는 언제든 결핍의 죄수가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서로를 비난하기보다 결핍의 무게를 덜어주는 사회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 센딜 멀레이너선 외 - 결핍의 덫과 희망의 설계

 

『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가난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인지과학의 문제다


과도한 이자를 물며 돈을 빌리고, 건강에 해로운 음식을 끊지 못하며, 마감 직전에야 허둥지둥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 우리는 종종 이러한 행동을 보며 '의지박약'이나 '게으름', 혹은 '현명하지 못함'이라는 꼬리표를 쉽게 붙인다. 그러나 만약 이 모든 비합리적인 행동이 개인의 성격이나 지능 탓이 아니라, '결핍'이라는 강력한 외부 환경이 만들어낸 인지적 결과라면 어떨까?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 센딜 멀레이너선(Sendhil Mullainathan)과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교수 엘다 샤퍼(Eldar Shafir)의 기념비적 저작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Scarcity: Why Having Too Little Means So Much)』는 바로 이 혁명적인 관점을 제시하며 행동경제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책은 돈, 시간, 음식, 사회적 관계 등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부족함'이라는 상태가 단순히 불편함을 넘어, 인간의 사고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예측 가능한 행동 패턴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방대한 연구와 생생한 사례를 통해 증명한다. 저자들은 결핍이 우리의 정신을 사로잡아 단기적인 집중력을 높이는 '이점'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야를 극도로 좁히고 인지적 자원을 고갈시켜 결국 더 깊은 결핍의 덫에 빠뜨리는 '비용'을 청구한다고 주장한다.

 

 

1부. 결핍의 사고방식 (The Scarcity Mindset)


1부에서는 결핍이 인간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사고방식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한 핵심적인 두 가지 메커니즘, '집중과 터널링' 그리고 '대역폭 고갈'을 설명한다.


1장. 집중과 터널링의 차이


결핍은 우리의 정신을 사로잡는다. 배고픈 사람이 음식 생각에 몰두하듯, 돈이 부족하면 돈 문제에, 시간이 없으면 마감일에 온 정신이 집중된다. 저자들은 이러한 현상이 양날의 검처럼 작용한다고 말한다.


• 집중 배당금(Focus Dividend): 결핍의 긍정적 측면이다. 마감 시한이 임박했을 때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해 일을 끝내거나, 가진 돈이 적을 때 예산을 더욱 꼼꼼하게 관리하는 것처럼, 결핍은 우리를 당면 과제에 매우 집중하게 만들어 일시적으로 생산성을 높인다. 이는 결핍이 주는 '보너스'와 같다.


• 터널링(Tunneling): 집중의 부정적 대가다. 마치 어두운 터널 안에 들어가면 터널 끝의 불빛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결핍에 사로잡히면 당장 급한 문제 외에 다른 중요한 것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당장의 카드값을 막기 위해 고금리 대출을 받는 사람은 그 결정이 미래에 가져올 더 큰 재앙을 고려하지 못한다. 바쁜 업무에 치여 자동차 정비를 미루다가 더 큰 수리비를 내게 되는 것도 터널링의 결과다. 결핍은 우리의 시야를 극단적으로 좁혀, 장기적인 계획이나 잠재적 위험을 무시하게 만든다.


2장. 정신에 부과되는 세금


결핍이 일으키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우리의 '정신적 대역폭(mental bandwidth)'을 고갈시킨다는 점이다. 대역폭이란 문제 해결, 집중, 자제력, 장기 계획 등 고차원적인 정신 활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지적 자원의 총량을 의미한다.


• 대역폭의 두 요소: 인지 능력과 실행 제어: 대역폭은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고 문제를 푸는 '인지 능력(fluid intelligence)'과 충동을 억제하고 목표에 집중하는 '실행 제어(executive control)' 능력으로 구성된다.


• 대역폭 세금(Bandwidth Tax): 결핍은 이 소중한 대역폭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한다. 컴퓨터에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띄워놓으면 속도가 느려지듯, "이번 달 방세는 어쩌지?"와 같은 걱정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면 다른 일에 쓸 정신적 에너지가 줄어든다. 저자들은 인도 사탕수수 농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이를 증명한다. 농부들은 수확 직후(부유할 때)와 수확 직전(가난할 때)에 동일한 지능 검사를 받았는데, 가난할 때의 점수가 부유할 때보다 현저히 낮게 나타났다. 이는 IQ 점수 13~14점 하락에 해당하는 수치로, 하룻밤을 꼬박 새운 것과 맞먹는 인지 능력 저하를 의미한다.


결국, 결핍 상태의 사람은 단순히 돈이나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치 만성적인 수면 부족 상태처럼 인지 능력과 자제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매일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중고를 겪는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교육, 건강, 재무 관리 등에서 종종 나쁜 선택을 하는 이유가 그들이 어리석거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결핍이 부과한 '대역폭 세금' 때문임을 시사한다.


2부. 결핍의 악순환 (The Vicious Cycle of Scarcity)


2부에서는 결핍이 어떻게 스스로를 강화하며 빠져나오기 힘든 악순환의 고리, 즉 '결핍의 덫'을 만드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3장. 짐 꾸리기와 느슨함


• 느슨함(Slack): 결핍의 반대는 풍요가 아니라 '느슨함'이다. 느슨함은 예상치 못한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여유분' 또는 '완충 장치'를 의미한다. 돈이 넉넉한 사람은 갑자기 자동차가 고장 나도 큰 위기 없이 수리할 수 있지만,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에게는 작은 고장 하나가 생계 전체를 위협하는 재앙이 될 수 있다. 느슨함은 실수를 해도 회복할 기회를 주지만, 결핍은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4장. 결핍이 만든 전문가들


결핍은 사람들을 특정 영역의 '전문가'로 만든다. 가난한 사람은 100원의 가치를 부자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예산을 빠듯하게 관리하는 데 능숙하다. 하지만 이 전문성은 '터널 안'에서만 유효하다. 터널 밖의 장기적인 재무 계획이나 기회비용 계산에는 오히려 취약하다.


5장. 끊임없이 빌리는 사람들


터널링은 필연적으로 '빌리기(borrowing)'를 낳는다.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미래의 자원을 끌어다 쓰는 것이다. 마감에 쫓기는 직장인은 잠을 '빌려' 밤샘 근무를 하고, 생활비가 부족한 사람은 고금리 대출을 '빌려' 현재를 버틴다. 하지만 이러한 빌리기는 결국 미래에 더 큰 시간적, 금전적 결핍을 초래하며 빚의 늪에 빠지게 만든다.


6장. 결핍의 덫


결핍은 '집중 → 터널링 → 대역폭 고갈 → 나쁜 의사결정(특히 빌리기) → 더 심각한 결핍'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이것이 바로 '결핍의 덫'이다. 이 덫에 빠진 사람은 마치 수렁에서 허우적댈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것처럼, 결핍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결핍을 심화시키는 역설에 직면한다.


7장. 빈곤이라는 결핍


저자들은 이 결핍의 논리가 '빈곤' 문제에 가장 극명하게 적용된다고 말한다. 가난한 부모가 아이들에게 거칠게 대하거나 교육에 소홀한 경향을 보이는 것은 애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만성적인 대역폭 고갈로 인해 인내심과 장기적 계획 능력이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빈곤은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지적 자원을 끊임없이 약탈당하는 상태다.


3부. 결핍을 위한 설계 (Designing for Scarcity)


마지막 3부에서는 결핍의 심리학을 이해하고, 이를 개인, 조직, 사회 정책 설계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법을 모색한다.


8장.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법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지를 갖고 저축하라"고 말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 대신, 그들의 부족한 대역폭을 고려한 '설계'가 필요하다. 복잡한 서류 절차를 간소화하고,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미리 알려주며, 풍족할 때(예: 수확 직후) 저축이나 보험 가입과 같은 장기적인 결정을 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 훨씬 효과적이다.


9장. 조직의 결핍을 관리하라


항상 '급한 불 끄기'에만 매달리는 조직 역시 시간 결핍의 덫에 빠진 것이다. 저자들은 조직에 의도적으로 '느슨함'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느슨함은 단기적으로는 비효율적인 '군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예상치 못한 위기에 대응하고 혁신을 만들어내는 필수적인 완충 장치 역할을 한다.


10장. 일상 속의 결핍


개인 역시 자신의 결핍을 관리할 수 있다. 중요한 일은 대역폭이 풍부할 때 처리하고, 충동적인 결정을 막기 위해 신용카드 한도를 줄이는 등의 '자기 통제 장치'를 설계하며, 풍요로울 때 미래의 결핍에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용어 해설]


. 결핍 (Scarcity)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보다 적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주관적인 심리 상태. 돈, 시간, 칼로리, 사회적 관계 등 모든 자원에 적용될 수 있다.
. 집중 배당금 (Focus Dividend) 결핍이 주는 긍정적 효과. 부족한 자원에 정신이 집중되면서 당면 과제에 대한 생산성과 효율성이 일시적으로 높아지는 현상.
. 터널링 (Tunneling) 결핍이 주는 부정적 효과. 당장 급한 문제에만 시야가 극도로 좁혀져, 터널 밖에 있는 다른 중요하거나 장기적인 문제들을 보지 못하게 되는 현상.
. 대역폭 (Bandwidth) 인지 능력, 실행 제어, 자제력 등 고차원적인 정신 활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지적 자원의 총량. '정신적 용량'으로 비유할 수 있다.
. 대역폭 세금 (Bandwidth Tax) 결핍으로 인한 걱정과 계산이 지속되면서, 대역폭의 상당 부분이 소모되어 다른 정신 활동에 사용할 수 있는 용량이 줄어드는 현상.
. 느슨함 (Slack) 결핍의 반대 개념. 예상치 못한 문제나 실수를 흡수할 수 있는 여유 자원 또는 완충 장치. 느슨함은 실패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 빌리기 (Borrowing) 터널링으로 인해 당장의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미래의 자원(돈, 시간 등)을 앞당겨 쓰는 행위. 결국 미래에 더 큰 결핍을 초래한다.
. 결핍의 덫 (Scarcity Trap) 결핍이 터널링과 대역폭 고갈을 유발하고, 이로 인한 나쁜 결정(특히 빌리기)이 다시 결핍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구조적 해석


『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는 행동경제학의 저작이지만, 그 근간은 인지심리학의 깊은 통찰에 뿌리내리고 있다. 특히 이 책의 핵심 개념인 '대역폭'과 '터널링'은 대니얼 카너먼이 제시한 '두 시스템(System 1, System 2)' 이론과 밀접하게 연결하여 해석할 수 있다.


카너먼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는 빠르고 직관적이며 감정적인 '시스템 1'과, 느리고 논리적이며 신중한 '시스템 2'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시스템 2는 복잡한 문제를 분석하고 충동을 억제하는 등 고차원적인 정신 활동을 담당하지만, 작동하는 데 많은 인지적 에너지를 소모하며 본질적으로 '게으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멀레이너선과 샤퍼가 말하는 '대역폭'은 시스템 2가 작동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 에너지 총량'과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결핍은 끊임없는 걱정과 계산을 유발함으로써 이 대역폭, 즉 시스템 2의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고갈시킨다. 그 결과, 시스템 2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사실상 '셧다운' 상태에 빠진다.


시스템 2가 마비되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판단과 행동은 대부분 자동적이고 충동적인 시스템 1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터널링' 현상은 바로 이 시스템 1의 작동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시스템 1은 복잡한 장기적 결과나 통계적 확률을 계산하는 대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가장 자극적이고 감정적인 문제에만 반응한다. 당장의 위협(카드값 연체)을 피하기 위해 미래의 더 큰 위험(고금리 대출)을 감수하는 것은, 시스템 2의 논리적 계산이 멈추고 시스템 1의 단기적 생존 본능이 발현된 결과다.
결국, 이 책은 결핍이라는 특정 조건이 어떻게 시스템 2의 작동을 체계적으로 방해하고, 우리를 시스템 1의 편향과 오류에 더욱 취약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강력한 심리학적 메커니즘을 제시한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비합리적' 행동이 그들의 내재적 결함이 아니라, 극한의 인지적 부하 상태에서 비롯된 보편적인 인간 반응임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것이다.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거미인간(Homo Nexus)


'거미인간(Homo Nexus)'은 선형적, 인과적 사고에서 벗어나 관계와 흐름을 감지하며 복잡한 세상 속에서 스스로 '의미의 그물'을 직조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상징한다. 이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눈앞의 현상을 넘어 전체 시스템을 조망하고, 다양한 요소들 간의 비선형적 상호작용을 이해하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유연하게 대응하는 고차원적인 인지 능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가 보여주듯, '결핍'은 이러한 거미인간으로의 진화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심리적 장벽이다. 결핍이 유발하는 '터널링'은 우리의 시야를 당면 과제라는 좁은 터널 안에 가두어, 거미인간의 핵심 역량인 '흐름 읽기'와 '관계 중심 사고'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거미줄 전체의 진동을 감지해야 하는 거미에게 오직 눈앞의 나뭇잎 하나만 보도록 강요하는 것과 같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대역폭 세금'이다. 거미인간이 복잡한 '의미의 그물'을 짜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신적 '느슨함(slack)'과 고도의 시스템 사고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결핍은 우리의 대역폭을 끊임없이 잠식하여, 이러한 깊이 있는 사유에 필요한 인지적 자원을 남겨두지 않는다. 당장의 생존에 모든 정신적 에너지를 소진한 사람에게 세상의 복잡한 연결망을 감지하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결핍'은 인간을 거미인간의 대척점, 즉 가장 근시안적이고, 단절되었으며, 반응적인 존재로 전락시킨다. 따라서 거미인간이 살아가는 비선형적 사회를 설계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사회 구성원들이 결핍의 덫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느슨함'과 '대역폭'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결핍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관계와 연결의 시대를 여는 거미인간의 출현을 기대하기 어렵다.

 

 

『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비평


『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는 인간 행동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뒤집고, 결핍이라는 새로운 렌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특히 빈곤 문제를 개인의 실패가 아닌 인지과학적 현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과학적 반론을 제기하고 정책 입안자들에게 깊은 통찰을 주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의 강력한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그 관점에는 몇 가지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가장 핵심적인 비판은 이 책이 빈곤의 '심리적' 메커니즘에 집중한 나머지, 빈곤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구조적' 원인을 상대적으로 간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결핍이 대역폭을 고갈시켜 나쁜 선택을 유발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통찰이지만, 질문은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애초에 무엇이 그들을 결핍 상태로 몰아넣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심리를 넘어, 사회 구조의 문제로 시선을 확장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불안정한 고용 시장, 낮은 최저 임금, 교육 및 의료 시스템의 불평등, 그리고 주거 문제와 같은 구조적 요인들은 개인이 아무리 합리적으로 노력해도 벗어나기 힘든 결핍을 지속적으로 생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버드대 사회학자 매튜 데즈먼드(Matthew Desmond)의 퓰리처상 수상작 『쫓겨난 사람들(Evicted)』은 『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의 완벽한 보완재이자 비판서가 될 수 있다.

데즈먼드는 밀워키의 빈곤 지역에서 수년간 현장 연구를 통해, '주거 불안'과 '퇴거'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빈곤을 영속시키는지를 생생하게 고발한다. 월세가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단 한 번의 실직이나 질병은 곧바로 퇴거로 이어지고, 퇴거 기록은 더 나은 주거 환경이나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개인이 '나쁜 선택'을 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착취하는 주택 시장과 그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법적 시스템이라는 '구조'가 결핍의 덫을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멀레이너선과 샤퍼가 제안하는 '결핍을 고려한 설계'(예: 복잡한 행정 절차 간소화)는 분명 의미 있는 해결책이다. 하지만 이는 이미 결핍 상태에 놓인 사람들을 돕는 '사후적' 처방에 가깝다. 데즈먼드의 연구는 결핍을 애초에 발생시키는 구조 자체를 바꾸는 '사전적' 개입, 즉 공공주택 확대, 임대료 통제, 퇴거 방지 법안 강화 등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결론적으로, 『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는 '결핍의 덫'이라는 악순환의 내부 엔진(심리적 메커니즘)을 탁월하게 분석했지만, 그 덫을 설치하고 유지하는 외부의 힘(사회 구조)에 대해서는 충분한 조명을 비추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두 책을 함께 읽을 때, 우리는 비로소 빈곤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개인의 인지와 사회의 구조라는 두 개의 렌즈를 통해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함께 읽어야 할 책


. 매튜 데즈먼드, 《쫓겨난 사람들: 도시의 빈곤에 관한 생생한 기록》:  이 책은 결핍의 '심리학'을 넘어 빈곤을 야기하는 '사회 구조'를 파헤친다. 《결핍》이 결핍 상태에 빠진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한다면, 이 책은 그들을 결핍으로 몰아넣는 '외부'의 힘(특히 주거 문제)을 생생하게 고발한다. 두 책을 함께 읽으면 빈곤 문제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얻을 수 있다.

. 리처드 탈러 & 캐스 선스타인, 《넛지: 파이널 에디션》 : 《결핍》의 3부 '결핍을 위한 설계'는 결국 '넛지'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인간의 비합리성과 인지적 한계를 인정한 상태에서, 더 나은 선택을 유도하기 위해 선택 환경을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공유한다. 《넛지》는 이러한 '선택 설계'의 원리를 더욱 광범위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주며, 《결핍》이 제시한 문제의 실용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깊은 영감을 준다.

.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 《결핍》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필독서다.  '대역폭'과 '터널링' 개념은 카너먼의 '시스템 1'과 '시스템 2' 이론 없이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이중적 사고 시스템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인지 편향을 먼저 이해한다면, 결핍이 왜 그토록 우리의 판단력을 체계적으로 붕괴시키는지 더욱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