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히켈'의 『적을수록 풍요롭다』
성장할수록 왜 더 불행해지는가? 제이슨 히켈의 '적을수록 풍요롭다' 탈성장, 인클로저, 녹색성장 비판을 심층 분석합니다.
총평
제이슨 히켈의 『적을수록 풍요롭다』는 단순한 '환경 도서'의 범주를 넘어선다. 이 책은 기후 위기라는 '증상'을 넘어, 그 '병의 근원'인 자본주의의 내재적 '성장 강박' 을 정면으로 겨냥하는 21세기의 가장 급진적이고 정직한 선언문 중 하나이다.
히켈의 가장 큰 기여는 '탈성장' 담론을 학계의 논의에서 대중의 장으로 성공적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는 '탈성장'이 금욕적 '희생'이나 암울한 '긴축'이 아니라, 오히려 불필요한 노동과 소비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풍요'(공동체, 시간, 공공재)를 되찾는 '해방의 프로젝트'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특히 데카르트의 이원론에서 시작해 인클로저 운동, GDP의 허상, 녹색 성장의 기만, 그리고 애니미즘적 연결성으로 끝맺는 그의 서사는, 파편화되어 있던 역사, 철학, 경제, 생태학을 '성장 비판'이라는 하나의 거대하고 일관된 서사로 엮어내는 데 성공했다.
명백한 한계와 비판: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켈의 논증은 강력한 반론에 직면한다.
첫째, 그의 역사관은 전(前)자본주의 시대를 다소 낭만화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둘째, '녹색 성장'의 가능성을 너무 쉽게 일축한다는 '기술 비관론'적 시각은 로버트 폴린과 같은 학자들의 실증적 반론에 부딪힌다.
셋째, 가장 결정적으로, '어떻게' 이 전환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전략이 모호하여 '급진적이지만 순진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적을수록 풍요롭다』는 "우리가 과연 '영원한 성장'이라는 궤도 위에서 생존할 수 있는가?"라는, 21세기가 외면해 온 가장 정직한 질문을 던진다. 히켈의 답이 유일한 정답은 아닐지라도, 그는 '성장'을 비판하는 것이 금기시되던 시대에 "왕은 벌거벗었다"고 외친 가장 설득력 있는 목소리 중 하나이다. 이 책은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 것조차 금지당한 우리에게, '포스트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상상력의 영토를 열어준 필수적인 텍스트이다.

『적을수록 풍요롭다』
'많을수록 빈곤하다'는 역설의 제기
현대 문명은 '성장'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질주해왔다. 모든 국가, 모든 산업 부문에서 국내총생산(GDP) 그래프의 우상향은 인류 번영의 필요조건이자 절대 선(善)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경제인류학자 제이슨 히켈(Jason Hickel)은 그의 저서 『적을수록 풍요롭다 (Less Is More)』에서 이 거대한 신화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히켈은 상승하는 GDP 그래프와는 정반대로, 대다수 인류의 삶의 질과 행복은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지구 생태계는 회복 불가능한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진단한다. 그는 "많을수록 빈곤하다"라는 도발적인 역설을 통해, 우리가 '풍요'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파괴'와 '결핍'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폭로한다.
이 책은 총 2부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왜 지금의 시스템이 잘못되었는가'를 역사적, 철학적, 경제적으로 추적하는 '진단'이며, 2부는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 것인가'에 대한 '처방'이다.
들어가며 │ 인류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히켈은 우리가 현재 '인류세(Anthropocene)'¹에 살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인류세란 인간의 활동이 지구 전체의 지질학적 환경을 바꾸는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히켈은 이 용어가 '누가' 이 위기를 초래했는지 모호하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그는 인류 전체가 아니라, 지난 500년간 이 시스템을 주도해 온 자본주의와 특정 국가들(글로벌 북반구)이 위기의 핵심 책임자임을 명확히 한다. 따라서 이 위기는 '인류세'가 아니라 '자본세(Capitalocene)'라고 불려야 마땅하다.
1부 │ 많을수록 빈곤하다 (The Critique)
1장. 자본주의: 탄생 이야기
히켈은 자본주의가 애덤 스미스의 주장처럼 평화로운 시장 교환을 통해 자연스럽게 발전했다는 주류 경제학의 신화를 정면으로 파괴한다. 자본주의의 탄생은 '풍요'가 아닌 '인위적 희소성(artificial scarcity)'의 창조 과정이었다.
그 핵심 기제는 바로 '인클로저(Enclosure)'² 운동이다. 15세기 유럽 농민들은 '커먼즈(Commons)'라 불리는 공유지에서 목축, 땔감 수집, 경작을 통해 자급자족하며 살아갔다. 이들은 화폐 소득은 적었을지 몰라도 생존에 필요한 핵심 자원에 접근할 수 있었기에 '풍요로운 빈곤'을 누렸다.
그러나 자본주의 엘리트들은 이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고 폭력적으로 사유화했다(인클로저). 하루아침에 생존 수단을 빼앗긴 농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도시로 내몰려, 공장의 저임금 노동자(프롤레타리아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즉,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교환'이 아니라 '폭력적 수탈'을 통해 노동력을 확보한 '기획'이었다.
이러한 폭력은 철학적으로 정당화되었다. 히켈은 '근대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를 핵심 인물로 지목한다. 데카르트가 인간(정신)과 자연(물질/기계)을 날카롭게 분리하는 '기계론적 이원론'을 제시함으로써, 자연은 신성한 생명체에서 '착취'하고 '지배'해도 되는 단순한 '자원'으로 전락했다. 자연과의 연결이 끊어지자, 자연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2장. 저거너트의 등장
이렇게 탄생한 자본주의는 왜 멈출 수 없는가? 히켈은 자본주의가 '사용 가치'(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가치)가 아닌 '교환 가치'(시장에서의 가격, 즉 이윤)를 유일한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자본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투입되며, 창출된 이윤은 다시 더 큰 이윤을 위해 재투자되어야 한다.
이 시스템 하에서 '성장'은 선택이 아니라, 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한 '강제적 명령'이다. 이윤 창출과 무한 축적을 위해 끊임없이 팽창해야 하는 자본주의는 멈출 수 없는 거대한 바퀴, 즉 '저거너트(Juggernaut)'³에 비유된다.
이 맹목적인 성장의 논리는 20세기에 '국내총생산(GDP)'이라는 지표를 통해 종교적 지위를 획득했다. GDP는 한 국가의 성공을 측정하는 유일한 지표가 되었다. 하지만 GDP는 재난 복구 비용(예: 태풍 피해 복구)이나 환경오염(예: 정화 비용)이 발생할 때도 상승한다. 반면, 가사 노동, 육아, 공동체 활동, 생태계의 건강처럼 '좋은 삶'의 핵심적인 요소들은 전혀 측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성장을 위해 웰빙을 희생하는 시스템에 갇히게 되었다.
3장. 기술이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많은 주류 환경론자들은 '녹색 성장(Green Growth)'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기술 혁신을 통해 경제 성장(GDP)은 지속하면서도, 환경 파괴(자원 사용, 탄소 배출)는 줄이는 '디커플링(Decoupling)'⁴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히켈은 이것이 위험한 환상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실증적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상대적 디커플링'(예: GDP가 2% 성장할 때 자원 사용은 1% 성장)은 일부 국가에서 나타났지만,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 필요한 '절대적 디커플링'(예: GDP는 성장하되 자원 사용의 총량이 감소)은 전 지구적으로 단 한 번도 관찰된 바 없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기술 효율성의 증가는 '제본스의 역설(Jevons' Paradox)'⁵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연비가 좋아지면(효율성 증가), 사람들은 유류비 부담이 줄어들어 더 많이 운전하게 되고(수요 증가), 결국 총에너지 소비량은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
히켈은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며 기술 혁신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장'이라는 운영체제(저거너트) 하에서는, 기술 혁신조차 더 많은 생산과 파괴를 가속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성장' 그 자체이다.
2부 │ 적을수록 풍요롭다 (The Solution)
4장. 좋은 삶의 비밀
1부에서 '많을수록 빈곤하다'고 진단했다면, 2부는 '적을수록 풍요롭다'는 처방을 제시한다. 히켈은 GDP와 행복이 비례한다는 통념을 반박한다. 경제 성장이 일정 수준(이스털린의 역설)을 넘어서면, GDP 증가는 더 이상 국민의 행복이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는 GDP는 낮지만 국민 행복도와 삶의 질(기대수명, 교육 수준)이 매우 높은 코스타리카, 쿠바 등의 사례를 제시한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막대한 사적 소비가 아니라, '보편적 공공 서비스'(무상 의료, 무상 교육, 저렴한 주거)라는 '공공의 풍요(public abundance)'가 잘 갖춰져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풍요는 더 많은 상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노동에서 해방되어 충분한 '여가 시간'을 누리고, 질 좋은 '공공재'를 공유하며, '강력한 공동체'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5장. 포스트 자본주의 세계로 가는 길
히켈은 '성장'을 멈추자는 주장이 '불황(recession)'이나 '긴축(austerity)'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강조한다. 불황은 '계획 없는' 붕괴이며 사회적 약자에게 고통을 전가하지만, '탈성장(Degrowth)'⁷은 생태 한계 내에서 모두의 웰빙을 보장하기 위한 '민주적이고 계획적인' 전환이다.
그는 '포스트 자본주의'⁶로 가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들을 제안한다 :
1. 파괴적 산업의 계획적 축소: 화석 연료, 군수 산업, 광고, 패스트 패션처럼 생태적으로 파괴적이거나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부문을 의도적으로 축소한다.
2. 유용한 산업의 성장: 반대로 재생 에너지, 공공 의료, 교육, 돌봄 노동, 생태 농업 등 '좋은 삶'에 필수적인 부문은 오히려 성장시킨다.
3. 정의로운 분배: 부유세 도입, 최고-최저 소득 격차 제한 등을 통해 극단적인 불평등을 해소한다. 불평등이 줄면 타인에게 과시하기 위한 '과시적 소비'의 동기가 사라져 자연스럽게 소비가 줄어든다.
4. 노동 시간 단축: 기술 발전을 통한 생산성 향상의 과실을 더 많은 '성장'이 아닌 '노동 시간 단축'(예: 주 4일제)으로 전환한다. 이는 일자리를 나누고, 사람들이 노동과 소비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공동체 활동과 여가를 즐길 시간을 보장하며, 사회 전체의 생태 발자국을 줄인다.
5. 보편 기본소득(UBI) 또는 보편 기본 서비스(UBS): 성장에 의존하지 않는 강력한 사회 안전망을 구축한다.
탈성장은 GDP를 인위적으로 줄이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탈성장의 목표는 '생태 한계 내에서의 웰빙'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GDP가 하락하더라도 "괜찮다(If GDP falls, so be it)"고 말하는 것이 히켈의 핵심 주장이다.
6장.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 장에서 히켈은 1장의 철학적 문제(데카르트의 이원론)로 돌아간다. 그는 '분리'의 철학에 대한 대안으로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관을 제시한다. 이는 자연을 단순한 '자원'이 아닌 '주체'로,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는 '애니미즘(Animism)'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이 '연결성'의 회복은 반드시 '글로벌 정의'의 회복을 포함해야 한다. 글로벌 북반구(선진국)의 풍요와 성장은 역사적으로 글로벌 사우스(남반구, 개발도상국)의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식민주의)한 결과물이다. 히켈은 북반구가 남반구에 막대한 '생태 부채(Ecological Debt)'⁸를 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탈성장은 북반구의 '의무'이다. 반면, 식민지배의 피해를 입었고 생태 발자국이 여전히 적은 남반구 국가들은 자국민의 '좋은 삶'을 위한 공공재(의료, 교육 등)를 구축하기 위해 일정 수준의 '성장'이 필요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탈성장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원칙에 따라 차등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용어)
• ¹ 인류세 (Anthropocene): 노벨상 수상자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이 2002년 제안한 용어. 인간의 활동이 지구 기후와 생태계에 너무 큰 영향을 미쳐, 지질학적으로 새로운 시대(홀로세 다음)에 진입했다는 개념.
• ² 인클로저 (Enclosure) / 커먼즈 (Commons): '커먼즈'는 공동체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하던 땅(숲, 목초지 등)을 의미. '인클로저'는 15세기 이후 유럽 영주와 지주들이 이 공유지에 울타리를 쳐 사유화한 과정을 말함. 히켈은 이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인 '본원적 축적' 과정이었다고 본다.
• ³ 저거너트 (Juggernaut): 멈출 수 없는 거대한 힘이나 파괴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맹목적 신념을 비유. 인도 신화에서 유래. 히켈은 자본주의의 '무한 성장 논리'를 이에 비유함.
• ⁴ 디커플링 (Decoupling, 탈동조화): 경제 성장(GDP)과 자원 소비/환경 파괴 사이의 연결을 끊는 것. '상대적 디커플링'은 성장률보다 자원 소비 증가율이 낮은 것, '절대적 디커플링'은 성장을 하면서도 자원 소비/배출량의 총량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
• ⁵ 제본스의 역설 (Jevons Paradox): 19세기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가 제기. 특정 자원의 '사용 효율성'이 높아지면, 그 자원의 비용이 낮아져 결국 '총소비량'은 오히려 늘어난다는 역설.
• ⁶ 포스트 자본주의 (Post-capitalism): 자본주의(이윤과 성장 중심)가 아닌 새로운 원리(지식 공유, 생태적 균형, 공동체)에 기반한 미래의 경제 시스템을 총칭하는 용어.
• ⁷ 탈성장 (Degrowth): 경제의 '물질과 에너지 처리량'(Social Metabolism)을 생태계가 감당 가능한 수준까지 '계획적으로' 줄이고, 그 과정에서 공공복리와 정의를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상 및 운동.
• ⁸ 생태 부채 (Ecological Debt): 글로벌 북반구(선진국)가 역사적인 식민지배와 불공정한 무역을 통해 남반구(개발도상국)의 자원을 과도하게 착취하고, 기후 변화의 책임을 불공정하게 전가함으로써 발생한 '생태적 빚'.
『적을수록 풍요롭다』구조적 해석
히켈의 주장은 여러 학문적 토대 위에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다.
1. 생태경제학적 해석: 경제를 '물리적 실체'로 간주하다
히켈은 경제를 돈의 흐름(주류 경제학)으로 보지 않고, '사회적 신진대사(Social Metabolism)' 라는 생태경제학의 핵심 개념으로 분석한다. 이는 경제 시스템이 자연으로부터 에너지와 물질을 투입(Input)받아,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최종적으로 폐기물을 배출(Output)하는 물리적 과정이라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 '경제 성장'은 곧 '신진대사 속도의 가속화'를 의미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더 많은 자원 고갈과 폐기물 배출을 의미한다. 히켈이 3장에서 '절대적 디커플링'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녹색 성장'은 이 신진대사의 물리적 한계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히켈이 2부에서 제안하는 '탈성장'은, 이 '사회적 신진대사'의 총량을 지구 생태계가 감당할 수 있는 안전한 수준(Planetary Boundaries) 으로 '의도적으로 늦추는 것'을 의미한다.
2. 사회철학적 해석: '분리(Separation)'의 철학에 대한 비판
히켈의 논증은 경제 이전에 철학을 겨냥한다. 그는 근대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한 핵심 기제를 '분리(Separation)'의 철학으로 본다.
• 1단계 (인간과 자연의 분리): 1장에서 분석했듯,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자연을 '타자화', '객체화'하여 착취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했다.
• 2단계 (인간과 생존수단의 분리): 인클로저 운동은 농민들을 공유지(커먼즈)라는 생존 수단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분리시켰다.
• 3단계 (인간과 인간의 분리): 이 과정에서 공동체는 파괴되고, 모든 개인은 생존을 위해 서로 경쟁해야 하는 '고립된' 존재(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되었다.
• 4C단계 (북반구와 남반구의 분리): 식민주의는 착취하는 자(북반구)와 착취당하는 자(남반구)를 지리적으로 분리시켜, 착취의 결과를 은폐했다.
히켈에게 '성장주의'는 이러한 '분리의 철학'이 경제 시스템으로 구현된 것이다. 따라서 그가 6장에서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고 선언하는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1장에서 제기한 근본적 문제(분리)에 대한 철학적 '봉합'이자 대안적 세계관의 제시다.
3. 심리학적 해석: '풍요'라는 내면의 감각은 어떻게 파괴되었는가
히켈의 주장은 '성장주의가 어떻게 우리의 내면을 식민화했는가'에 대한 날카로운 심리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 '인위적 희소성'과 생존 불안: 1장에서 다룬 인클로저 운동은 단순히 물리적 결핍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언제든 나의 생존 기반을 빼앗길 수 있다'는 심리적 불안정성(Precarity)을 대중의 무의식에 각인시켰다. 성장에 대한 현대인의 맹목적인 집착은, 이 근원적인 '생존 불안'을 해소하려는 끊임없는 방어기제일 수 있다.
• '소비주의'라는 거짓된 욕망: 4장에서 히켈은 불평등이 '과시적 소비'를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이는 심리학의 '사회적 비교 이론(Social Comparison Theory)'과 정확히 일치한다. 나의 행복이 절대적 기준이 아닌, 타인과의 '상대적 위치'에 의해 결정될 때 , 우리는 진정한 연결(공동체) 대신 물질(명품, 사치재)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증명하려 한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압박이 심해지는 것은, 결핍 때문이 아니라 '비교' 때문이다.
• 내재적 동기의 억압: 자본주의는 '외재적 동기'(돈, 지위, 보상) 를 극대화하는 시스템이다. 반면, 히켈이 4장에서 말하는 '좋은 삶'은 '내재적 동기'(자율성, 관계, 유능감) 에 기반한다. 성장에 대한 끊임없는 압박은 사람들을 과도한 노동과 소비의 쳇바퀴로 내몰아, 정작 자신의 삶을 돌보고 타인과 깊이 관계 맺을 '시간'과 '심리적 여유'를 박탈함으로써 내재적 동기를 체계적으로 억압한다.
따라서 히켈이 제안하는 '탈성장'은 '덜 갖자'는 금욕이나 희생의 요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외재적 동기'(성장률, GDP)의 압제에서 벗어나 '내재적 동기'(웰빙, 시간, 공동체)를 회복하자는 '심리적 해방(Psychological Liberation)'의 선언이다.
『적을수록 풍요롭다』거미인간(Homo Nexus)
'호모 넥서스(Homo Nexus)', 즉 '연결된 인간'이라는 개념은 인류가 거대한 정보 네트워크와 '상상의 질서'(혹은 '허구의 넥서스') 를 창조하고 공유함으로써, 물리적 한계를 넘어 수백만 단위의 협력을 조직하고 문명을 구축하는 존재임을 조명한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가 『사피엔스』에서 강조했듯, 이 '연결' 능력이야말로 인류의 핵심 특징이다.
이러한 '호모 넥서스'의 관점에서 제이슨 히켈의 『적을수록 풍요롭다』를 재해석할 때, 이 책은 '성장주의 자본주의'가 바로 이 인류 본연의 '넥서스(연결망)'를 어떻게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왜곡했는지를 고발하는 보고서이자, '진정한 넥서스'를 회복하기 위한 선언문으로 읽힌다.
히켈이 1장에서 근대성의 출발점으로 지목한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연결'을 부정하는 '분리의 철학' 그 자체이다. 이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 흐르던 가장 근원적인 '넥서스'를 끊어버렸다. 자연을 '우리'의 일부가 아닌 '그것(it)'으로 객체화함으로써, 자연은 무한히 착취해도 되는 '자원 저장고'로 전락했다.
이 철학적 분리는 '인클로저'라는 물리적 분리로 즉각 이어졌다. 히켈이 강조하는 공유지(Commons)는 단순한 땅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대지가 맺고 있던 가장 원초적이고 구체적인 '사회-생태적 넥서스'였다. 자본주의는 이 연결망을 폭력적으로 해체하고, 그 자리에 '임금'이라는 가늘고 위태로운 연결선 하나만을 남겨두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 즉 고립되고, 경쟁하며, 이기적인 개인이다. 이는 '호모 넥서스'의 정반대 형상이다.
히켈이 4장에서 불평등이 과시적 소비를 부추긴다고 분석한 것은, '사회적 넥서스'가 파괴된 개인이 타인과의 '연결감' 대신 '상대적 우월감'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병리적 현상을 정확히 보여준다.
따라서 히켈이 2부에서 제안하는 '탈성장'과 '포스트 자본주의'는 '호모 넥서스'의 복권(復權) 프로젝트이다. 그가 GDP 대신 '공공의 풍요'(보편적 공공 서비스)를 강조하는 것은, 사적 소유(분리)가 아닌 공공재(연결)를 통해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새로운 '넥서스'를 다시 짜자는 제안이다. 노동 시간을 단축하자는 주장은, 우리를 '노동-소비의 쳇바퀴'에서 해방시켜 가족, 친구, 공동체, 그리고 자기 자신과 다시 '연결'될 시간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마지막 6장에서 히켈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고 선언하며 애니미즘적 세계관과 글로벌 남반구에 대한 '생태 부채'를 거론하는 것은 이 복권 프로젝트의 완성이다. 이는 데카르트가 끊어버린 '자연-인간의 넥서스'를 복원하고(애니미즘), 식민주의가 부정했던 '북반구-남반구의 넥서스'를 정의의 원칙 위에서 다시 세우자는 요구이다.
결론적으로, 『적을수록 풍요롭다』는 성장이 '호모 넥서스'의 본질인 '연결망'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불태우는 '저거너트'임을 폭로한다. 그리고 '탈성장'이란 이 파괴적인 기계를 멈추고, 지구라는 유한한 행성 위에서 '연결된 존재'로서 우리가 진정으로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넥서스'를 재설계하자는 21세기의 가장 시급한 제안이다.
『적을수록 풍요롭다』비평
제이슨 히켈의 주장은 강력하고 서사적이지만, 학계의 엄밀한 검증대 위에서 몇 가지 중대한 비판과 반론에 직면한다. 그의 역사관과 경제관은 특히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다.
1. [팩트체크/역사관] "인클로저 이전, 농민들은 '풍요'로웠는가?"
• 히켈의 주장: 히켈은 인클로저 이전의 농민들이 '커먼즈'를 통해 자급자족하며 돈은 적었지만 '좋은 삶(lived well)'을 살았다고 주장한다. 즉, 당시의 빈곤은 현대의 '현금 빈곤'과 다르며, 자본주의가 이들을 '인위적으로' 빈곤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그는 16세기 43세였던 영국인 평균 기대수명이 자본주의가 만연한 1700년대에 30대 초반으로 떨어졌다는 공중 보건 기록을 근거로 제시한다.
• 비판적 반론: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나 막스 로저(Max Roser)와 같은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들은 이를 '낭만적 과거의 환상(pure fantasy)'이라고 정면 반박한다. 이들은 전(前)자본주의 시대의 삶이 질병, 기근, 아동 사망, 폭력으로 점철되었으며, 1820년 94%에 달했던 절대 빈곤율이 자본주의적 성장을 통해 지난 200년간 10% 미만으로 극적으로 감소했다고 주장한다.
• 전문가 검증 및 결론:
이 논쟁은 '빈곤'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싸움이다.
1. 사실 관계: 히켈이 인용한 자본주의 초기(16-18세기) 기대수명 하락이나 식민지 착취는 역사적 사실이다. 초기 산업화와 도시화는 열악한 노동 환경과 전염병 확산으로 공중 보건 재앙을 초래했다.
2. 해석의 문제: 핑커 등은 '절대 빈곤(하루 $1.90 미만)'이라는 현금 기준을 사용한다. 히켈은 이 기준 자체가 문제라고 본다. 화폐 경제에 편입되지 않고 공유지에서 자급자족하던 사람을 '절대 빈곤'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적 관점의 폭력이라는 것이다.
결론: 히켈이 전(前)자본주의 시대를 과도하게 낭만화했다는 비판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가 '자본주의의 등장이 폭력적이었으며, 초기 수백 년간 대다수 민중의 삶을 악화시켰다'고 지적한 핵심은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2. [팩트체크/경제관] "디커플링(녹색 성장)은 정말 불가능한가?"
• 히켈의 주장: 앞서 3장에서 요약했듯, 히켈은 '절대적 디커플링'은 실증적 증거가 부족하며, 제본스의 역설로 인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 비판적 반론 (비판적 녹색성장론): 로버트 폴린(Robert Pollin)과 같은 진보 경제학자들은 히켈의 주장이 비관적이며 정치적으로 패배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1. 디커플링은 가능하다: 폴린 등은 GDP와 탄소 배출 사이의 '절대적 디커플링'이 이미 일부 국가(미국, 유럽 등)에서 관찰되고 있으며, 이는 100% 재생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효율에 대한 대규모 공공 투자(즉, '글로벌 그린 뉴딜')를 통해 전 지구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2. 탈성장은 비효율적이다: 폴린은 전 세계 GDP를 10% 줄여도 탄소 배출은 고작 10% 줄어들 뿐이며, 기후 위기를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필요한 것은 GDP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GDP의 구성을 바꾸는(화석연료 산업, 재생에너지 산업) 강력한 '산업 정책'이라는 것이다.
• 전문가 검증 및 결론:
이 논쟁은 현재 생태경제학의 가장 뜨거운 감자이다. 히켈은 '자원(Material Footprint)'의 디커플링은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며, 폴린은 '탄소(Carbon)'의 디커플링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표 1> 탈성장(Degrowth) vs. 녹색성장(Green Growth) 핵심 논점 비교
| 쟁점 | 탈성장 (제이슨 히켈) | 비판적 녹색성장 (로버트 폴린) |
| 핵심 진단 | '성장' 자체가 문제. 자본주의와 성장은 분리 불가능. | '성장의 내용'(화석연료 의존)이 문제. |
| 목표 | 생태 한계 내의 '웰빙' (GDP 하락 용인). | '절대적 탄소 디커플링'을 통한 탄소 중립 및 경제 성장. |
| 핵심 수단 | 불필요한 산업의 '계획적 축소'. | 재생에너지에 대한 '대규모 공공 투자' (그린 뉴딜). |
| 주요 한계 | 정치적 실현 가능성이 낮음. | (자원에 대한) 디커플링의 실증적 증거가 불충분함. |
3. [정치경제학적 비판] "탈성장은 '어떻게' 실현되는가?"
• 히켈의 주장: 5장에서 민주적 계획, 공공재 확충, 노동 시간 단축 등 '포스트 자본주의'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 비판적 반론: 히켈의 대안은 '무엇을(What)'은 있으나 '어떻게(How)'가 빠져 있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1. 정치적 주체의 부재: '누가' 이 거대한 전환을 이끌 것인가? 히켈은 "우리(We)"라는 불분명한 주체를 사용하지만, 화석연료 산업과 성장주의에 묶인 자본/국가의 강력한 저항을 어떻게 돌파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전환 전략(Transition Strategy)'이 취약하다.
2. '나이브(Naïve)한' 전략: 비판가들은 히켈의 전략이 '지역적/자발적 이니셔티브'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자본주의라는 글로벌 시스템을 바꾸기에는 순진한 접근이라고 비판한다.
3. 재원 조달의 불가능성: 탈성장(경제 축소) 사회에서 보편 기본소득이나 공공재를 유지할 막대한 재원을 '지속적으로'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가 불분명하다는 현실적 비판이 제기된다.
함께 읽어야 할 책
• 『격차: 빈곤과 불평등의 세기를 끝내기 위한 탈성장의 정치경제학』 제이슨 히켈 (Jason Hickel) - : 『적을수록 풍요롭다』의 선행 연구 격인 책.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착취와 불평등('생태 부채' ) 문제를 더욱 심도 있게 다루며, 빈곤과 불평등의 역사를 추적한다.
• 『미래는 탈성장: 자본주의 너머의 세계로 가는 안내서』 마티아스 슈멜처, 안드레아 베터, 아론 반신티안 - : 히켈의 책이 '선언'이라면, 이 책은 탈성장 담론의 역사, 다양한 조류, 구체적인 정책들을 집대성한 '교과서'이다. 탈성장에 관한 오해(긴축, 불황)를 반박하고 정의로운 미래를 위한 경로를 제시한다.
• 『포스트 성장 시대는 이렇게 온다: 대전환과 새로운 번영을 위한 사유』 팀 잭슨 (Tim Jackson) - : 탈성장 담론의 또 다른 거두인 팀 잭슨의 저서. '성장 없는 번영'이라는 개념을 대중화했으며, 히켈보다 더 철학적이고 시적인 문체로 '좋은 삶'의 의미를 탐구한다.
• 『기후 위기와 글로벌 그린 뉴딜: 인류의 생존 매뉴얼』 노엄 촘스키, 로버트 폴린 (Robert Pollin) - : 본 보고서의 비판 섹션(4부 2항)에서 히켈의 핵심 반론자로 등장한 로버트 폴린의 책이다. 탈성장(GDP 축소)이 아닌, 대규모 공공 투자를 통한 '녹색 성장'만이 기후 위기의 유일한 현실적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 『민중을 위한 그린 뉴딜』 맥스 아일 (Max Ajl) - : 제이슨 히켈이 강력하게 추천한 책이지만 , 동시에 히켈의 (잠재적) 한계를 보완한다. 북반구 중심의 '그린 뉴딜'과 (때로 유럽 중심적인) '탈성장' 담론 모두를 비판하며, 글로벌 사우스(남반구) 민중의 시각에서 '반(反)제국주의적' 생태 정의와 식량 주권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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