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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해석과 이해(구조와 에세이)/책 해석과 이해(경제,전략)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구조적 해석

by 유미 와 비안 2025. 10. 22.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구조적 해석

 

2008년 전 세계를 강타한 금융 위기는 단순한 경제적 충격을 넘어, 지난 수십 년간 세계 경제를 지배해 온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시장의 효율성과 자기조정 능력을 맹신했던 주류 경제학은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고, 그 해법을 제시하는 데도 무력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런던 정경대를 방문하여 던진 "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은 시대의 당혹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출간된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자본주의에 대한 통념을 뒤엎는 도발적인 주장으로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의 목표는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장하준 교수는 자본주의가 "수많은 문제점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좋은 경제 시스템"이라고 인정한다. 그가 비판하는 대상은 단지 "지난 30여 년간 세계를 지배해 온 특정 자본주의 시스템, 즉 자유 시장 자본주의"일 뿐이다. 그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유일한 대안이 아니며, 지난 30년간의 성과가 결코 최선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평범한 시민들이 경제에 대한 잘못된 신화에서 벗어나 '경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고,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만들기 위한 논의에 동참하도록 촉구하는 지적 무기다.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 장하준 - 구조적 해석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구조적 해석


경제학, 심리학을 만나다: 행동경제학으로 본 장하준의 통찰


장하준 교수의 주장은 주류 경제학의 핵심 전제인 '합리적 인간(Homo Economicus)' 가정을 정면으로 비판한다는 점에서 행동경제학 및 인지심리학의 통찰과 깊은 연관성을 맺는다. 그는 경제 현상을 순수한 논리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복잡한 심리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 제한된 합리성과 Thing 16: 장하준이 "우리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도 될 정도로 영리하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허버트 사이먼이 제시한 '제한된 합리성'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인간은 의사결정을 할 때 세상의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수집하고 처리할 수 없으며, 인지 능력의 명백한 한계를 가진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는 이러한 인간의 인지적 한계가 얼마나 치명적인 시스템 붕괴를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다. 이는 시장 참여자들의 합리성을 전제로 하는 '효율적 시장 가설'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시장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한 규제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 자기충족적 예언과 Thing 5: "최악을 예상하면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는 주장은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의 '자기충족적 예언' 이론으로 명쾌하게 설명된다. 경제 시스템이 인간을 오직 이기적인 존재로만 규정하고, 그에 맞춰 감시와 통제, 성과급과 같은 인센티브 구조를 설계하면, 사람들은 실제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신뢰, 협력, 자발성과 같은 중요한 사회적 자본은 파괴되고, 시스템은 오히려 더 비효율적으로 변한다. 이는 인간의 다면적 동기를 무시한 경제 모델이 사회 전체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 사회적 신뢰의 경제학: 장하준은 신뢰, 정직, 협력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 가치가 경제 시스템의 원활한 작동에 필수적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이는 소득 불평등이 심한 사회일수록 구성원 간의 사회적 신뢰 수준이 낮아진다는 수많은 사회과학 연구 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극심한 불평등은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킨다. 이러한 갈등을 관리하는 데 드는 사회적 비용(예: 범죄 예방, 소송 비용)은 결국 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장기적인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거미인간(Homo Nexus)


장하준의 경제학은 '호모 넥서스(거미인간)'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깊은 공명 관계를 맺는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상정하는 '선형적(linear)' 경제 모델, 즉 합리적 개인이 예측 가능한 시장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대신 그는 경제를 역사, 정치, 문화, 기술이 복잡하게 얽힌 '비선형적(non-linear)' 네트워크, 즉 거대한 '거미줄'로 바라본다.
'자유 시장은 없다'(Thing 1)는 그의 도발적인 선언은, 시장이 자연 발생적인 직선이 아니라 수많은 규제와 권력 관계라는 보이지 않는 '실'들로 정교하게 짜인 인공적 구조물임을 의미한다. 선진국들이 부를 축적해 온 과정(Thing 7)을 역사적으로 분석하며, 경제 발전이 단일한 선형 경로가 아닌 각국의 특수한 맥락 속에서 다양한 '연결'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제한된 합리성'(Thing 16)과 인간의 복잡한 동기(Thing 5)에 대한 그의 강조는, 경제 주체를 독립된 '객체'가 아닌, 관계와 감정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파악하는 '관계 중심 사고'의 핵심을 이룬다.
결국 장하준이 제안하는 '더 나은 자본주의'란선형적 계획과 통제의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는 복잡한 연결망의 '진동을 감지'하고, 공동체의 '관계를 책임'지며, 지속 가능한 '의미의 그물'을 함께 직조해 나가는 '호모 넥서스'의 경제학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비판적 성찰과 대안


장하준 교수의 저서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력하고 대중적인 비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보다 균형 잡힌 시각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 강점: 역사적 접근과 현실성: 장하준의 가장 큰 학문적 기여는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모델에 매몰된 주류 경제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역사'와 '현실'을 경제학의 중심으로 되돌려 놓았다는 점이다. 그의 풍부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들은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경제 문제가 결코 가치중립적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 비판 1: '정부 실패'의 위험성 간과: 그는 '시장 실패'를 교정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강력하게 옹호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부 실패'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는 경향이 있다. 정부의 개입이 항상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비효율적인 관료제, 정보의 비대칭성, 부정부패, 그리고 특정 이익집단에 의해 정책이 '포획(capture)'되는 문제 등으로 인해 정부의 개입이 시장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정부의 '역량'과 '책임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 비판 2: 역사 해석의 편향성: 그의 논증 방식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례를 선택적으로 제시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예를 들어, 한국의 경제 성장을 설명하면서 정부의 역할을 극대화하고, 당시 기업가들의 혁신적 노력이나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시장 경제 요소의 기여를 과소평가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의 경제 성공은 강력한 국가 개입과 함께 점진적인 시장 개방 및 세계 경제 편입이 결합된 복합적인 결과라는 점에서, 그의 보호무역주의 논리를 단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 비판 3: 대안의 구체성 부족: 장하준은 신자유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는 '더 나은 자본주의'를 모색하는 개혁주의자의 입장에 서 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는 그가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과 착취 구조를 외면하고, 국가 개입을 통해 시스템의 문제점을 봉합하려는 '자본주의의 유능한 의사'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 장하준이 지속적으로 문제 삼는 '부의 불평등'을 방대한 역사적 데이터를 통해 실증적으로 분석한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장하준의 '낙수 효과' 비판(Thing 13)과 강력한 이론적 배경을 공유한다.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 장하준 사상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뿌리 중 하나로 꼽히는 명저다. 폴라니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사회를 시장에 종속시키려는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개념이 인간 사회의 근본을 파괴하는 '유토피아적 망상'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장하준의 '자유 시장은 없다'(Thing 1)는 주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시장 경제가 사회 속에 '묻어 들어가 있어야(embedded)' 한다는 그의 핵심 사상은 장하준 경제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밀턴 프리드먼, 『선택할 자유』: 장하준이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신자유주의 사상의 정수를 담은 고전이다. 프리드먼은 정부 개입을 '통제라는 이름의 폭군'으로 규정하고, 개인의 '선택할 자유'와 자유 시장의 자생적 질서 및 효율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한다. 장하준의 주장과 정확히 반대 지점에 서서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하므로, 두 책을 비교하며 읽는 것은 비판적 사고를 기르는 데 매우 유용하다.

 애덤 스미스, 『국부론』 : 모든 경제학 논의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을 인용하며 시장의 자유를 옹호하지만, 장하준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 이전에 쓴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의 '공감(sympathy)' 능력과 사회적 규범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했는지를 상기시킨다. 『국부론』 원전을 직접 읽음으로써 애덤 스미스의 사상이 후대에 의해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고 때로는 오용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