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허구의 힘'이 만든 현실의 비밀 (feat. 거미인간)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밝혀낸 인류 문명의 놀라운 비밀, '허구의 힘' 우리가 믿는 돈, 국가, 종교는 어떻게 세상을 움직였을까요? 인류학, 심리학, 경제학을 넘나들며 허구의 힘이 만든 현실과 미래의 '거미인간'을 탐구합니다.
[유발 노아 하라리 - 사피엔스 ]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까마득한 옛날부터 인간을 경외심으로 이끌었듯,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라는 작은 행성 위에서 경이로운 문명을 직조해 왔습니다.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고, 바다를 건너 교역하며, 달나라에 발자국을 남기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로 전 세계와 소통합니다.
이 모든 기적의 뒤편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그러나 지극히 설득력 있는 답변을 던집니다. 바로 ‘허구의 힘’, 혹은 ‘공유된 신화(Shared Myth)’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거대한 사파리에서 고작 덩치 큰 침팬지와 다를 바 없었던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수십만, 수백만 명이 모여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돈’이라는 종이 조각으로 전 세계를 연결하며, ‘국가’라는 이름 아래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하라리의 통찰은 우리 문명의 뿌리가 단순한 물리적 현실이 아닌, 우리 모두가 ‘믿기로 동의한’ 이야기들의 거미줄로 이루어져 있음을 밝혀냅니다. 마치 '거미인간'이 실을 토해내어 세상을 엮어내듯, 호모 사피엔스는 허구라는 실을 토해내어 지금의 현실이라는 거대한 그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인류학적 통찰 - 인지혁명이 낳은 ‘이야기하는 동물’의 위력
약 7만 년 전, 인류 역사에 ‘인지혁명’이라는 거대한 변곡점이 찾아왔습니다. 하라리는 이 혁명이 호모 사피엔스에게 언어 능력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다주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사자가 온다"와 같은 현실적인 정보를 공유하는 것 이상의, 훨씬 더 강력한 능력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그 상상을 타인과 공유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조현욱 역, 김영사, 2018, pp. 29-37 참조).
이전까지 다른 인류 종이나 동물들은 기껏해야 수십 명 단위의 작은 무리 안에서만 친밀한 유대감을 통해 협력할 수 있었습니다. 사냥감을 나누고, 서로의 등을 긁어주며, 직접적인 관계에 기반한 신뢰를 쌓았죠. 하지만 인지혁명 이후 호모 사피엔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 조상신, 혹은 부족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 이야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 '공유된 신화'는 혈연이나 지리적 한계를 넘어선 대규모의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마법의 접착제가 되었습니다. 낯선 부족민이라도 같은 신화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로 신뢰하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능력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어떤 생물 종도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지구 전체를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도구를 잘 만들거나 똑똑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믿고 함께 행동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철학적 고찰 - 객관 현실 너머의 '상호 주관적 실재'
하라리의 ‘허구의 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진실’과 ‘현실’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물리적인 존재를 '객관적 현실'이라고 한다면, 국가, 돈, 인권, 법률, 기업과 같은 개념들은 어디에 존재할까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그렇다고 믿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하라리는 이를 ‘상호 주관적 실재(Intersubjective Reality)’라고 명명합니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조현욱 역, 김영사, 2018, pp. 110-115 참조). 즉, 한 명의 개인이 믿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이 '함께 믿는' 순간 그것은 강력한 현실이 됩니다.
이러한 상호 주관적 실재는 단순히 환상이나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사회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데 필수적인 구조물입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할 때, 우리는 물리적인 것보다 오히려 이 상호 주관적 실재, 즉 사회적 구성물에 더 깊이 얽매여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특정 브랜드의 옷을 입거나, 특정 대학의 학위를 추구하고, 특정 기업에 소속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는 물리적인 의미가 없지만, 사회가 부여한 '이야기'와 '가치'를 통해 강력한 현실로 작동합니다. 인류는 객관적 현실을 넘어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의미를 창조하고, 복잡한 사회적 상호작용의 그물을 엮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심리학적 이해 - 무의식과 집단의 동조가 빚어낸 믿음의 심리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렇게 '허구'를 쉽게 믿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까요? 이는 인간의 심리적 특성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판단 외에도 '인지 편향(Cognitive Biases)'이나 '군중 심리(Crowd Psychology)'와 같은 비선형적인 심리적 요인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은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것을 지지하는 정보에만 집중하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받아들인 '공유된 신화'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심리적 기제가 됩니다. 우리가 속한 집단이 특정 허구를 믿기 시작하면, 개인은 합리적인 의심을 하기보다는 그 믿음에 동조하려는 강한 심리적 압력을 받습니다. 이는 우리가 '정의', '애국심'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쉽게 집단의 허구에 몰입하고 동원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또한, 칼 융(Carl Jung)이 말한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 속의 '원형(Archetypes)'도 '허구의 힘'이 작동하는 심리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칼 구스타프 융, '인간과 상징', 이윤기 역, 열린 책들, 2011, pp. 50-70 참조).
영웅, 어머니, 현자, 악당 등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정신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보편적인 이미지들은 특정 종교, 국가, 혹은 이념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강력한 감정적 공명과 동조를 이끌어냅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특정 원형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기업들이 제품에 원형적인 스토리텔링을 입혀 소비자의 무의식에 호소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심리적 기제를 활용하는 예시입니다. 우리의 정체성 또한 이러한 '허구'의 그물망 속에 촘촘히 엮여 있습니다.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이다', '나는 어떤 기업에 속해 있다', '나는 어떤 종교를 믿는다'는 모든 정체성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이야기'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경제학적 분석 - 돈과 기업, 가장 강력한 '허구'의 실체
'허구의 힘'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분야 중 하나가 바로 경제입니다. 유발 하라리는 '돈'을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공유된 신화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조현욱 역, 김영사, 2018, pp. 195-204 참조).
종이 한 장, 혹은 디지털 숫자에 불과한 돈이 전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돈'이라는 허구에 대한 보편적인 믿음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돈을 가지면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다는, 보이지 않는 약속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깨지는 순간, 돈은 단순한 종이 조각이 되고, 경제 시스템 전체가 붕괴합니다.
마찬가지로 '기업' 또한 하라리가 말하는 대표적인 '허구의 힘'입니다. 물리적으로 기업은 건물, 기계, 사람들의 집합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기업'이라는 독립적인 법인격(Legal Fiction)은 설립자의 죽음이나 직원들의 퇴사와 관계없이 영속적으로 존재하며, 소송을 걸고, 재산을 소유하며, 계약을 체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허구' 덕분에 우리는 수십만 명의 직원이 모인 삼성전자나 애플 같은 거대 기업을 상상하고, 그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믿고, 그들의 주식을 사고팔며 전 세계적인 경제 활동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가 현실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예시입니다. 행동 경제학이 밝혀낸 인간의 비합리적인 의사결정 패턴이나 시장의 비선형적인 움직임 또한, 합리적인 계산이 아니라 '신뢰'와 '기대', '두려움'과 같은 공유된 심리적 허구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미인간', 허구의 그물을 읽고 새로운 실을 엮다
유발 하라리의 '허구의 힘'에 대한 통찰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비선형적인 디지털 시대에 더욱 깊은 의미를 던져줍니다. 소셜 미디어 속에서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수많은 '이야기'와 '이미지', 즉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허구'들은 우리의 현실을 더욱 빠르게, 그리고 예측 불가능하게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인플루언서의 삶이라는 허구, 특정 브랜드가 만들어내는 감성이라는 허구, 가짜 뉴스를 통해 퍼져나가는 왜곡된 현실이라는 허구… 우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허구의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라리의 통찰은 우리에게 절망만을 안겨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거미인간'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지혜를 제공합니다. '거미인간'은 단순히 이러한 허구의 그물에 갇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그 그물이 어떻게 짜였는지, 어떤 실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지금의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감각'하고 '읽어낼' 줄 아는 존재입니다. 즉, 겉으로 보이는 '진실'이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의 '합의된 믿음' 위에 세워진 허구일 수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무턱대고 모든 것을 부정하고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허구는 인류의 대규모 협력을 가능하게 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필수적임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인권, 법치주의와 같은 개념들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믿고 지켜나가기로 동의한 강력한 '허구'들입니다. '거미인간'은 이러한 허구의 양면성을 이해하고, 파괴적이거나 분열을 조장하는 허구에 휩쓸리지 않으며, 인류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와 '신화'를 스스로 엮어낼 줄 아는 능력을 가집니다.
결국,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던지는 '허구의 힘'에 대한 메시지는 호모 사피엔스가 단순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를 넘어, '이야기를 믿고 함께 상상하는 동물'이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우리가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살아갈 '거미인간'으로서, 수동적으로 허구의 그물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그 그물의 실타래를 이해하고, 때로는 해체하며, 때로는 더 나은 의미의 새로운 그물을 직조하는 능동적인 존재가 되어야 함을 일깨웁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함께 믿고 어떤 '신화'를 공유하며 만들어갈지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미줄의 진동을 감각하듯, 이 거대한 '허구의 그물' 속에서 우리의 역할과 의미를 찾아낼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