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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해석과 이해(구조와 에세이)/책 해석과 이해(인문학)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 살구, 거울, 얼음 그리고 이야기의 실타래로 엮어낸 상처와 치유의 연대기!

by 유미 와 비안 2025. 8. 7.

세계적인 작가 '리베카 솔닛'의 대표 에세이 『멀고도 가까운』

어머니의 병과 자신의 암 투병 속에서,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타인과 공감하고 자신을 구원하는지를 탐색하는 깊고 아름다운 여정.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 100파운드의 살구더미, 어머니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이야기의 실로 상처를 꿰매는 법
"모든 이야기는 결국 여행이고, 그 여행은 우리를 멀리 데려갔다가 마침내 가장 가까운 곳,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 데려다준다."
미국의 작가이자 사상가, 그리고 '걷기'의 철학자인 리베카 솔닛은 그녀의 가장 내밀하고도 아름다운 책 '멀고도 가까운(The Faraway Nearby)'에서 이처럼 이야기의 본질을 꿰뚫습니다. 이 책은 어느 여름날, 알츠하이머를 앓는 어머니가 집 앞에 두고 간 100파운드의 살구더미에서 시작됩니다. 썩어가는 살구들을 보존하고, 나누고, 이야기로 만들면서 솔닛은 자신의 병(암 수술), 어머니와의 갈등, 그리고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체 게바라의 여정, 아이슬란드의 빙하에 이르기까지 시공간을 넘나드는 거대한 사유의 여행을 떠납니다.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를 통해 서로에게 다가가고, 공감하며, 마침내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지에 대한 깊고 서정적인 탐구입니다.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 공감과 연대의 서사시

 

『멀고도 가까운』

 

이 책은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따르지 않습니다. 대신 '살구-거울-얼음-비행-숨-감다-매듭-풀다-숨-비행-얼음-거울-살구'로 이어지는 완벽한 회문(palindrome) 구조를 통해, 독자를 문제의 가장 깊은 중심('매듭')으로 이끌었다가 다시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오게 만드는 독특한 여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장은 하나의 은유를 중심으로, 솔닛의 개인적 경험과 인류의 보편적 이야기가 씨실과 날실처럼 엮입니다.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 공감과 연대, 이야기


• 1부 & 13부 살구 (Apricots): 이야기의 시작과 끝
어머니가 남긴 살구더미는 썩어가는 기억이자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의 상징입니다. 솔닛은 이 살구를 병조림으로 만들고 이웃과 나누는 행위를 통해, 흩어진 삶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이야기'로 만드는 작가의 소명을 이야기합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살구'는 다시 등장하며,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마침내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한 이야기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 공감과 자기인식 거울


• 2부 & 12부 거울 (Mirrors): 공감과 자기 인식
이야기는 타인과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솔닛은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깊이 파고들며,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괴물의 고독에 공감합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멀리 떨어진 존재의 고통을 바로 내 옆의 것처럼 느끼고, 그 거울을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됩니다.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 거리와 탐험의 관계, 내명의 지도


• 3부 & 11부 얼음 (Ice): 거리와 탐험
솔닛은 문자 그대로 '얼음의 땅' 아이슬란드로 떠납니다. 얼음은 어머니와의 관계처럼 차갑고 먼 거리를 상징하는 동시에,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용기를 의미합니다. 그녀는 북극 탐험가들의 이야기와 체 게바라의 오토바이 여행을 교차시키며, 물리적 여행이 어떻게 내면의 지도를 그리는 과정이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 탈출, 자유, 연결


• 4부 & 10부 비행 (Flight): 자유와 연결
나방과 나비의 비행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이동, 즉 고통으로부터의 탈출과 자유를 상징합니다. 동시에 이 작은 생명체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연결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 숨


• 5부 & 9부 숨 (Breath): 생명과 연대
'숨'은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자 타인과의 연결을 의미합니다. 솔닛은 나병환자촌의 역사를 통해, 질병에 대한 공포가 어떻게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침묵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도 서로를 돌보는 연대가 어떻게 생명의 숨을 이어가는지를 탐색합니다.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 매듭, 이야기의 실


• 6부, 7부, 8부 감다, 매듭, 풀다 (Winding, Knots, Unwinding): 여정의 심장부
책의 중심부에서 솔닛은 실을 잣고, 매듭을 짓고, 다시 푸는 행위를 통해 이야기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감다'는 이야기의 실타래를 푸는 과정, '매듭'은 그녀 자신의 암 수술과 어머니의 병이 교차하는 삶의 가장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지점, 즉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풀다'는 이 엉킨 매듭을 풀어내며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는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에게 주었던 실처럼, 우리를 삶의 미로에서 구원하는 것이 바로 '이야기의 실'임을 암시합니다.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 공감과 연대의 이야기

『멀고도 가까운』 구조적 해석


솔닛의 글은 장르를 규정하기 어렵지만, 여러 학문 분야의 관점에서 깊이 있게 분석될 수 있습니다.


• 문학적 비평 및 서사 이론(Narratology) 관점:
이 책은 근본적으로 '이야기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야기는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탐구입니다. 솔닛은 이야기가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경험을 구성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며, 타인과 공감하게 만드는 '세상 만들기(world-making)'의 행위임을 보여줍니다. 회문 구조 자체도 '모든 이야기는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서사 이론적 통찰을 형식적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야기라는 실로 각자의 삶을 직조한다. 어떤 실은 끊어지고 어떤 실은 엉키지만, 그 실을 다시 잇고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살아가는 것이다." 


• 자전적 비평(Autotheory) 및 장르 연구 관점:
솔닛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어머니의 병, 자신의 수술)을 출발점으로 삼아 문학, 역사, 지리학, 철학을 넘나드는 거대한 사유를 펼칩니다. 이는 단순한 회고록(memoir)을 넘어, 개인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을 엮어내는 '자전적 비평' 또는 '오토씨어리'*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녀에게 '나'는 탐구의 끝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렌즈이자 시작점입니다.


• 문화 지리학 및 장소 연구 관점:
솔닛은 '걷기'의 작가답게, 장소와 공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사유는 캘리포니아의 아파트, 아이슬란드의 빙하, 루이지애나의 나병환자촌 등 구체적인 장소를 따라 이동합니다. 그녀에게 장소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과 기억, 역사가 얽혀 있는 텍스트입니다. 

"모든 여행은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우리는 멀리 떠남으로써 역설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 즉 우리 자신에게 닿을 수 있다." 


• 페미니즘 및 공감(Empathy) 연구 관점:
이 책은 깊이 있는 페미니즘 텍스트입니다. 솔닛은 메리 셸리, 버지니아 울프 등 여성 작가들의 삶과 작품을 재조명하고, 남성 중심의 서사에서 배제되었던 '공감'과 '돌봄'의 가치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가져옵니다. 특히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통해, 남성적 영웅주의가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윤리적 행위임을 역설합니다.

 

『멀고도 가까운』 거미인간(호모 넥서스)


리베카 솔닛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이 바로 세상을 비선형적인 그물로 감지하고 직조하는 '거미인간(호모 넥서스)'임을 증명합니다. 책의 회문 구조 자체가 시작과 끝이 명확한 '직선' 서사를 거부하고, 중심으로 파고들었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그물'의 구조를 닮아 있습니다. 솔닛은 거미인간의 방식으로, 썩어가는 살구더미라는 '진동'에서 출발하여 프랑켄슈타인, 체 게바라, 아이슬란드, 나병 등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점'들을 '공감'과 '이야기'라는 실로 엮어냅니다. 그녀는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병치하고 연결함으로써 독자 스스로 그 사이의 숨겨진 '결'을 감지하게 만듭니다. 그녀에게 이야기는 세상을 재단하는 칼이 아니라, 단절된 존재들을 연결하고 상처를 꿰매는 바늘과 실입니다. 이 책을 읽는 행위는, 독자가 솔닛이라는 거미가 짜놓은 정교한 그물 위를 함께 걸으며,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떻게 멀고도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지 온몸으로 체험하는 과정입니다.

 

 

『멀고도 가까운』 비판과 논쟁


솔닛의 글은 수많은 찬사를 받지만, 그녀의 독특한 스타일과 관점은 몇 가지 비판적 논의를 낳기도 합니다.


• 산만하고 연상적인 글쓰기 스타일:

솔닛의 가장 큰 특징인 연상적이고 자유로운 글쓰기는 일부 독자들에게는 산만하거나 초점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명확한 논증과 직선적인 구성을 선호하는 독자라면, 그녀가 하나의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끊임없이 미끄러져 나가는 방식에 길을 잃거나 피로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때로 그 연결고리가 다소 작위적이거나 약하게 느껴진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 지적 엘리트주의 가능성: 

솔닛은 문학, 역사, 철학, 예술을 넘나드는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글을 씁니다. 이는 글에 깊이를 더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인용하는 텍스트나 역사적 배경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녀의 사유가 고등 교육을 받은 특정 지식인 계층의 경험과 관심사에 기반하고 있다는 '지적 엘리트주의'의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 감정의 절제와 거리두기: 

그녀는 자신의 암 투병이나 어머니와의 갈등처럼 지극히 개인적이고 고통스러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고 분석적인 거리를 유지합니다. 이러한 지적인 태도는 감정의 과잉을 피하게 해 주지만, 일부 독자들에게는 감정적인 공감을 어렵게 만들고 너무 차갑거나 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 정치적 구체성의 부족: 솔닛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같은 책에서 날카로운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만, 이 책에서는 사회 구조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나 구체적인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개인의 내면과 공감의 차원에 더 집중합니다. 이로 인해 그녀의 사유가 아름답지만 다소 관념적이거나 탈정치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비판도 가능합니다.

 

 

함께 읽어야 할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저, 김명남 옮김, 창비, 2015)『멀고도 가까운』이 솔닛의 서정적이고 철학적인 면모를 보여준다면, 이 책은 그녀의 날카롭고 정치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맨스플레인'을 통해 여성의 목소리가 어떻게 억압되는지 분석하며, 공감의 부재가 어떤 사회적 폭력을 낳는지 명확히 보여줍니다.

『길 잃기 안내서』 (리베카 솔닛 저, 김현우 옮김, 반비, 2018) '길을 잃는다'는 것의 의미를 탐색하며, 불확실성과 미지의 세계를 포용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또 다른 대표작입니다. 『멀고도 가까운』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경험과 역사, 철학을 넘나들며 '예측 불가능성'의 가치를 예찬합니다.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저, 이미애 옮김, 민음사, 2008) 솔닛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 에세이입니다. 여성의 내면과 창조성을 탐구하는 울프의 '의식의 흐름'과도 같은 글쓰기 방식은, 솔닛이 어떻게 자신만의 사유의 그물을 짜게 되었는지 그 원류를 엿보게 합니다.

『아르고호의 선원들』 (매기 넬슨 저, 김일신 옮김, 문학동네, 2021) 솔닛처럼 개인적 경험과 철학적 사유를 엮어내는 '오토씨어리(자전적 비평)' 장르의 또 다른 걸작입니다. 퀴어 이론, 페미니즘, 비판 이론을 자신의 파트너가 성전환을 겪는 과정과 엮어내며, 사랑과 가족, 정체성의 경계를 탐색합니다.